[사설] 시위 천국 만드는 集示法 고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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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집회와 시위가 잇따르면서 수년치 집회 신고를 미리 내는가 하면 집회 장소를 선점하기 위해 경쟁을 벌이는 등 웃지 못할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모두가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의 허점 때문에 비롯된 일들이다.

최근 부산에선 모 정당의 지구당이 10년간 시내 중심가에서 집회를 열겠다는 신고서를 경찰에 접수했으나 경찰이 관련 서류 보존기간을 이유로 3년간 집회를 허용키로 했다고 한다.

집회 소음에 시달려온 과천지역 주민들은 오는 10월 말까지 주말과 휴일 정부청사 앞을 선점하기 위해 집회신고를 냈고, 수원에선 전교조 경기지부와 중앙도서관 이용자들이 도교육청 정문 앞을 차지하기 위해 자리 다툼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현행 집시법(제11조)은 옥외 집회 및 시위의 금지 장소로 '청와대.국회의사당.각급 법원과 국내주재 외국 외교기관 등의 청사 또는 저택의 경계지점으로부터 1백m 이내'로만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군 기지나 군사 훈련장 주변에서도 집회.시위가 가능하다.

지난 7일 발생한 한총련 학생들의 미군 종합사격훈련장 기습시위 역시 합법적 집회 과정에서 빚어졌다. 여중생범대위 명의로 사격장 앞 도로의 정류장 옆에서 이날 전쟁훈련 규탄 결의대회를 연다는 집회신고서를 관할 경찰서에 접수시켰던 것이다.

집회와 시위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의사 표현의 한 방법이다. 따라서 정당한 집회.시위는 최대한 보장해줘야 한다. 그렇다고 사실상 아무 곳에서나 집회.시위를 할 수 있도록 법이 방치해선 안 된다. 사격훈련장 주변에서 시위를 벌이다 예기치 못한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이를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이제라도 집회 장소와 성격이 신고 내용과 다른 경우에도 엄격한 제재를 가하고, 옥외 집회신고 기간도 제한토록 법을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 집회.시위가 가능한 장소도 좀더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 아울러 소음 규제 등 피해자 보호 장치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