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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우리의 대통령은 메시아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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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전수경 화가

전수경 화가

촉박하다. 10월로 잡힌 개인전이 어느덧 네 달 앞으로 다가왔다. 진작 준비한 것 같은데 단 한 점의 그림도 출발시키지 못했다. 기껏 작업실을 정리하고 바닥에 장판을 깔았을 뿐 나의 캔버스들은 텅텅 비었다. 그래서 살가운 관심으로 이번 가을 전시회를 물어보는 이들의 기대가 부담스럽다. 작품은 머릿속에만 맴돌 뿐 구상을 위한 스케치마저 멈춘 것은 지난해 10월 거리에 촛불시위대가 쏟아져 나왔을 때부터다.

화가는 몸과 마음 가벼워야 원하는 그림 얻을 수 있어 #주권자인 국민도 대통령의 ‘전능’ 기대 부담 덜어줘야

나의 작품 제작이 머뭇거리는 사이 세상은 속절없이 변해버린 것 같다. 지난해 가을부터 여태 겪어보지 못한 큰 소용돌이가 나의 작업실과 1㎞ 남짓 떨어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벌어졌다. 순식간에 옛 대통령은 사라지고 이제 새 대통령이 TV에 나온다. 세상의 빠른 변화가 부럽다. 예술가란 시대에 앞서 스스로 새로워질 자유와 특권을 가진 직업인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번 대통령이 국민을 가까이하고 그들의 고통을 일일이 쓰다듬는 분이란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겠다고 약속도 했단다.

근대 민주주의 국가의 최초 대통령이라면 단연 미국의 조지 워싱턴이 꼽힌다. 그가 퇴임할 때까지 당시 많은 미국인은 대통령과 왕을 혼돈했다. 그들은 그의 능력으로 그들의 모든 문제를 해결받고 그의 은혜 속에 있고자 했다. 한마디로 구세주를 원한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워싱턴은 국민의 정서적 위안과 권능의 혜택은 제왕이 행사하는 것이지 대통령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한 차례의 연임 이후 깨끗하게 물러났다. 대통령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워싱턴이 왕이 되기를 거부한 것은 대통령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국은 프랑스와 치른 7년 전쟁의 부채를 메우기 위해 식민지인 미국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미국인들은 저항했고 영국과의 싸움에서 자신들을 대표할 대표자를 필요로 했다. 대통령은 오로지 현지 국민을 대리하는 직분으로 탄생했다. 왕처럼 자신에게 속한 백성을 두지 않기에 굳이 한량없이 자애로운 권능을 지녀야 할 의무가 없었다. 이처럼 1789년 워싱턴 대통령의 탄생은 혈연이나 세습에 의하지 않고 유일하게 임기가 정해진 국가 원수를 국민 스스로의 손으로 뽑은 최초의 사례인 것이다.

5000년 우리 역사에서 대통령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889년이다. 미국 주재 전권대신이던 박정양(朴定陽)이 미국의 대통령에 관해 보고하는 장면이 『고종실록』에 자세히 나온다. 박정양은 “미국의 백성과 관원이 모두 나라를 위해 성실히 일하고 세수가 잘 관리되기에 나라의 수입이 25% 흑자를 낸다”고 보고한다. 이에 고종은 “그들의 정책이 주도면밀하고 백성들이 잘 교육받아 선량하기 때문”이라고 평한다. 고종은 미국의 대통령이 산다는 백옥(白屋·백악관)이 부유한 백성의 집보다 초라하고, 큰절을 받는 대신 악수로 방문자의 알현을 받는다는 사실에 놀란다.

하지만 고종은 끝내 대통령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고종은 주권자로서 하늘을 대신해 덕(德)으로 백성을 다스려 왔지만 그의 대한제국은 머지않아 없어졌다. 오히려 대통령들이 국민을 대리한 뒤 임기를 마치면 쿨하게 떠난 미국은 더 부강해졌다. 계몽 군주도 좋은 정책과 좋은 교육은 펼칠 수 있다. 하지만 대통령제의 고갱이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대통령은 그들의 생존과 자유를 위해 일한다는 점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완벽하지 않으면 좋겠다. 이제 우리 대통령도 성군이 되기 위해 직분을 초월한 수고는 하지 않았으면 한다. 미국 워싱턴은 228년 전 왕이 되길 거부했지만 아직도 이 땅에는 ‘대통령=메시아’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어느 정권보다 여러 난제로 촉박하고 부담스러운 시작이다. 화가는 몸과 마음이 가벼워야 원하는 그림을 얻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통령에게 하늘의 자비로움이나 전능을 기대하는 부담은 덜어드리는 게 어떨까. 나도 조급한 마음부터 내려놓고 붓을 들어야겠다.

전수경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