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 “배우자의 계부·계모도 건보 피부양자 인정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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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984년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정모씨는 따로 자녀를 낳지 않고 30년 넘게 남편이 전처와 사이에 낳은 아들을 양육해왔다. 최근 아들이 실직하자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인 며느리의 피부양자로 자신을 등록하려 한 정씨는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등록을 거부당했다. 정씨가 며느리의 친시모가 아닌 계시모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정씨는 건강보험공단의 이 같은 결정이 “가족 형태를 이유로 한 차별이다”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차별조항 복지부 장관에 개정 권고 #“형제자매 피부양자 인정 범위 확대 #이혼한 형제자매에도 적용해야” #복지부 “지금도 피부양자 너무 많아”

인권위는 정씨의 사례가 ‘차별’이라고 판단했다. 인권위 차별시정위원회는 12일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에게 생계를 의존하고 있는 배우자의 계부모를 피부양자로 인정하도록 관련 규정을 개정하라”는 권고를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했다고 밝혔다. 국민건강보험법 제5조 2항에 따르면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의 직계존속(배우자의 직계존속 포함)만이 피부양자가 될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는 직장 가입자의 계부모와 배우자의 계부모는 물론 형제자매 또한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보건복지부는 해당 가족이 직장 가입자와 동거할 때나 소득이 없을 경우 ‘국민건강보험법 시행규칙’을 적용해 가입자의 계부모나 미혼인 형제 등은 피부양자로 인정하고 있다.

인권위의 이번 결정은 정씨의 사례를 비롯해 ‘아직 결혼하지 않은 형제자매는 직장 가입자의 피부양자가 될 수 있는 반면 혼인 경력(이혼·사별 등)이 있는 형제자매나 계형제자매, 계시부모는 직장 가입자의 피부양자가 될 수 없어 차별이다’는 내용을 담은 18건의 진정에 따른 결정이었다. 인권위는 “혼인 경력이 있는 형제자매 역시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에게 실제로 생계를 의존하고 있는 경우 피부양자로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다만 “계형제자매의 피부양자 인정 여부에 대해서는 국가가 재원을 확보하는 방법에 따라 피부양자 인정 범위를 달리 정할 수 있어 국회 입법 사항이다”고 설명했다.

건강보험 직장 가입자 피부양자 인정 기준에 대해 인권위가 권고를 내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미 인권위는 2006년과 2014년 총 4회에 걸쳐 혼인 여부나 계부모 여부가 아닌 경제적 능력 유무에 따라 피부양자 인정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복지부 장관에게 권고한 바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복지부에서는 재정 부담을 이유로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복지부 측은 “우리나라 건강보험 적용 인구의 약 40%(2000만 명) 이상이 직장 가입자의 피부양자로서 보험료를 내지 않고 보험급여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에 피부양자 대상을 최소화해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또 “현재 건강보험료 부과 체계 개편 작업을 통해 피부양자 인정 기준을 점차 축소해 나가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 인권위 권고를 어디까지 수용할 수 있을지 내부 검토 중이다”고 덧붙였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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