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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만약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5호 04면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그런 게 있다면 한번 상상해 보고 싶은 장면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꼭 50년 전인 1967년입니다. 그 해 개봉된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엄청난 흥행 성공을 거두자 후속편인 ‘호피와 차돌바위’까지 이어졌죠. 미군 항공 촬영용 필름을 얻어다 양잿물로 씻어가며 재활용했을 정도로 악전고투를 치렀던 신동헌 감독은, 그러나 서울대 건축학과 출신의 감수성과 열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몇 푼 더 싸게 만들어주겠다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버리는 국내 제작 현실에 질려 더 멋진 애니메이션 제작에의 꿈을 홀연 내동댕이치고 맙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데즈카 오사무라는 천재가 ‘철완 아톰’이라는 TV 시리즈 애니메이션으로 1963년부터 명성을 떨치고 있었죠. 4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그 차이는 컸습니다. 한 사람은 세계적인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비상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잊혀진 인물이 돼버렸죠. 그 나라는 미국과 자웅을 겨루는 애니메이션 강국이 됐고 다른 나라는 또 다른 나라가 시키는 대로 만들어주는 하청 국가로 더 알려졌습니다.

만약 그때 신동헌 감독이 애니메이션을 계속 만들었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일본을 능가하는 애니메이션 강국이 됐을까요, 아니면….

신동헌 화백이 6일 오전 90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특유의 빵모자를 쓰고 클래식 강연을 열심히 하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멋진 작업을 시작하시길.

정형모 문화에디터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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