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묘지가 가르쳐 준 풍요로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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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지난달 세계 연극제를 볼 요량으로 프랑스 아비뇽에 들렀다가 페스티벌이 취소되는 바람에 파리로 넘어갔다. 풀 죽을 건 없었다. 삶은 언제나 생각지 못한 선물을 마련해준다.

사흘쯤 머무르는 김에 파리의 베르라셰즈 묘지를 둘러보자고 마음먹었다. 사실 오래 전부터 프랑스를 빛낸 예술가들이 잠들어 있는 그 묘지에 가보고 싶었다. 나에게 그곳은 삶과 죽음과 예술이 하나의 광채가 돼 작열하는 가장 현실적인 공간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의 오랜 의문과 상념에 대답해줄 뭔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첫날, 하늘에 구름이 끼기 시작하자 비가 내릴까봐 허겁지겁 그곳에 갔지만, 이미 문이 닫혀 있었다. 다음날 역시 비가 내렸지만 그건 '묘지'가 주는 분위기나 상징성과 가장 부합되는 날씨라는 생각까지 하며 재도전했다. 이미 관광지이기도 한 그 묘지는 일종의 조각공원이었다.

크고 작은 조각들은, 죽음이란 작별의 예식이 아니라 일상의 예술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리아 칼라스도 에디트 피아프도, 또한 그토록 위대한 가문들의 예술가들조차 웅장하건 아니건 하나의 묘비로 남을 뿐임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빗줄기가 굵어져도 사람들은 그 묘지 안을 계속 서성거렸다. 나는 무엇보다 이사도라 덩컨과 마리아 칼라스의 무덤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구획과 번호까지 정해져 있는데도 무덤을 찾기 어려웠다. 가까이 가는 것 같은 데도 '블레어 위치' 속에라도 있는 건지, 도대체 찾을 수 없었다.

그녀의 무덤 앞엔 필시 춤을 추는 여인의 조각이 있을 거라고 상상한 나는 너무 상식적이고 어리석은 사람이었을까. 유니폼을 입은 묘역 관리인에게 이사도라 덩컨과 마리아 칼라스의 무덤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방백(傍白)을 하듯 나에게 되물었다.

"글쎄, 그녀들이 어디에서 잠자고 있을까?"

그녀의 그 멋진 프랑스어 발음과 마치 하나의 시구처럼 울려오는 대답 앞에 나는 알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말 한마디도 예술'이라는 다소 비굴한 경탄과도 닮아 있었다.

이사도라 덩컨의 무덤은 납골당에 있었다. 그녀는 납골당 대리석 벽에 사방 30㎝ 정도인 납골함에 안치돼 있었는데, 말라버린 소박한 꽃송이 몇 개가 얹혀 있을 뿐이었다. 왜 나는 이사도라 덩컨의 무덤이 화려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평범한 사람부터 시대를 밝힌 예술가에 이르기까지 죽음의 크기는 다르지 않은 건데….

이번엔 마리아 칼라스의 무덤을 찾았다. 워낙 방향치여서 또다시 헤매기 시작했다. 이브 몽탕의 무덤에 꽃을 올려놓던 어떤 할머니가 돕겠다고 나섰다. 놀랍게도 마리아 칼라스도 또 다른 납골당의 지하에 안치돼 있었다. 누군가가 옆에서 말해주었다.

칼라스는 자신의 뼈를 에게해에 뿌리고, 묘지엔 자신의 이름만 넣으라고 했다고. "오페라가 없어도 태양은 떠오른다. 하지만 오페라가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지 않는가." 칼라스가 남긴 말이 그녀의 납골당 앞에 선 나에게 환청이 아닌 실감으로 육박해왔다.

그 말은 오랫동안 연극을 해오는 동안 나 자신을 의심으로 괴롭히던 어떤 의문에 대한 해답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도 줄곧 생각했었다. '연극이 없어도 태양은 떠오른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세상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오페라가 있는 것처럼 그렇게 연극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묘지가 가르쳐 준 풍요로움은 죽음의 우울보다 더 강렬한 것이었다. 그날 나는 어둠 속에 실은 더 많은 빛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까지.

박정자 연극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