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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 역대 추경 논쟁...실체는 명분·법리 아닌 실리 챙기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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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경안의 용도가 크게 잘못돼 있다. 용도를 변경해야 한다.”
“경제 상황이 매우 어려워 추경이 꼭 필요하다. 추경이 통과되면 일자리를 많이 늘릴 수 있는 만큼 조속한 통과가 필요하다.”

지난해 9월2일 국회에서 추가경정예산안 표결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추경안은 국회에 제출된지 38일 만인 이날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다. 

지난해 9월2일 국회에서 추가경정예산안 표결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추경안은 국회에 제출된지 38일 만인 이날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다.

내주초 10조원대 추경안 국회 제출...야3당 반대로 진통 예상 #경기호전, 법적요건 미비, 장기적인 재정부담 등이 반대 이유 #하지만 경기호전기인 2013년에도 추경 편성...요건 불비 과거 추경도 수두록 #진보·보수정권 막론, 여야 입장 바뀌면 추경 접근법도 180도 달라져 #결국 추경은 명분·법리 논쟁 아닌 실리 추구의 전장...야당 실리 충족시 곧바로 통과 #“추경안 적정성은 철저히 살피되, 떡고물 챙기기용 반대는 온당치 않아” #

문재인 정부의 ‘1호 전장’(戰場)인 추가경정예산안의 국회 통과 시도를 앞두고 벌어진 ‘오픈게임’일까. 언뜻 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이 추구하는 ‘일자리 추경’에 대해 야당이 반대 공세를 펴고, 여당이 이를 방어하는 것 같은 공방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공방은 2년 전 당시 야당 대표이던 문 대통령이 추경 반대 공세에 나서고, 안종범 청와대 경제수석이 이를 방어한 내용이다. 이제는 당시 여당이 야당이 돼 추경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문 대통령이 집권자가 돼 추경 방어에 나서고 있는 지금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비단 그때와 지금의 일만은 아니다. 진보·보수 정권을 막론하고 언제나 추경에 대한 공격자는 야당이었고, 옹호자는 여당이었다. 여야가 바뀌면 역할도 정확하게 공수 교대된다. 모든 정치적 쟁론의 대상들이 그렇듯 추경 역시 전형적인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현령비현령’(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의 정치 사안이다. 다시 말해 추경을 반대하는 야당들이 명분과 원칙에 따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반대부터 하고 보는 측면이 있다는 얘기다.

현재 여당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10조원 규모의 추경에 대한 야당의 반대 이유를 살펴보자. 먼저 경기가 회복 국면인 만큼 추경을 편성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는 주장이 나온다. 실제 지금의 경제상황은 예상보다 좋다. 지난해말 경기전망은 그야말로 흙빛이었다. 수출·생산·투자·소비가 모두 바닥권이었고, 경제위기 임박설까지 퍼져나갔다. 1월이나 2월에 추경을 조기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봇물을 이뤘다.

하지만 올들어 거짓말처럼 경기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수출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더니 생산과 투자도 덩달아 호전되기 시작했다. 증시와 부동산 시장도 활황을 이어가고 있다. 마이너스 성장 가능성까지 제기되던 1분기 경제성장률은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0.9%에 달했다. 상식적으로는 추경을 편성해야 할 상황이라 보기 어렵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지난 4월 “경기대응용 추경은 이제 필요없어졌다”고 말했다.

공무원 증원이 주목적인 이번 추경이 법으로 정해진 추경 요건에 해당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 국가재정법에는 전쟁·자연재해·경기 침체·대량실업·남북관계의 변화·경제협력 등을 추경 편성 요건으로 명시해뒀다. 공무원을 늘리기 위한 목적의 추경은 법에 규정돼 있지 않은 게 사실이다.

지속적인 재정 부담 초래 가능성도 반대 이유로 지목된다. 과거 추경이 주로 일회성이었던데 반해, 이번 추경은 증원된 공무원들의 급여와 연금 등으로 내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예산이 투입돼야 하기 때문에 두고두고 나라살림에 부담을 주게 된다는 얘기다.

연도별 추경 편성 규모

연도별 추경 편성 규모

하지만 추경 찬성론자들 사이에서는 과거 추경과 비교해 볼 때 결코 무리한 추경이 아니라는 옹호론이 나온다. 박근혜 정부 시절이던 2013년의 추경을 살펴보자. 당시 당정은 “경제가 매우 나빠져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위기가 올 수 있다”며 그 4월 추경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추경안이 제출된 직후인 그 해 4월25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1분기 경제성장률 속보치는 0.9%(확정치는 0.7%)에 달했다. 예상을 뛰어넘는 수치였다. 그렇지만 정부와 여당은 추경 편성을 강행했다. 당시 기재부는 “경기의 흐름이 여전히 나쁘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 논리는 지금도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 민간 소비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는데다가 이번 경기회복이 지속적이지 않은 일회성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기 때문이다. 실제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내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로 올해(2.6%)보다 낮은 2.5%를 제시했다.

과거의 추경들이라고 해서 법적 요건에 충분히 부합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2008년의 고유가·고물가 고통 경감용 추경, 4대강 살리기 예산이 반영된 2009년 추경 때도 적법성 논란이 제기됐지만 추경안은 국회를 통과했다.

결국 추경은 당시의 경기 상황이나 법적 요건보다는 여·야간 협상에 따라 좌우된 측면이 크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야당이 ‘실리 챙기기’나 정책 선명성 부각을 위해 ‘밀고 당기기’의 수단으로 추경 반대론을 들고 나온 측면이 더 컸다는 얘기다. 실제 2000년 이후 이뤄진 12번의 추경들을 살펴보면 태풍이나 메르스 등 대형 천재지변의 경우를 제외하면 ‘추경안 제출→야당의 반대→여야간 협상→통과’의 수순을 예외없이 밟아왔다. 야당은 협상 과정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추경안을 통과시켜준 경우가 많았다.

실제 지난해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은 추경 통과의 조건으로 누리과정 예산지원 등을 요구했고, 그 결과 ‘교육·복지재정 3600억원 증액’이라는 성과를 따냈다. 슈퍼추경으로 불렸던 2009년 추경 때도 야당은 1185억원의 비정규직 지원 예산을 따낸 뒤에야 추경안을 통과시켜줬다.

이 때문에 이번에도 야3당이 끝까지 반대하진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다음주 초 10조원 규모의 추경안을 국회에 제출하면 야당들이 완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면서 수면 아래에서는 여당과 협상을 진행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여야 협상이 조속히 마무리되면 추경안 통과도 빨라지게 되고, 진통이 이어지면 추경안도 상당 기간 국회에 머물러 있게 될 수 밖에 없다.

추경안은 조속한 집행이 생명이라 국회에서 빨리 통과되지 않으면 의미가 크게 퇴색된다. 저소득층 생계안정 목적으로 편성된 2000년 추경안은 국회에서 106일 동안이나 처리되지 않았고, 2008년 추경안도 처리되는데 90일이나 걸렸다. 결국 여야의 협상력과 정치력에 따라 추경의 위력이 배가될 수도, 반감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한국재정학회장인 박종규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추경안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있지만 일자리 문제가 구조적으로 심각한 상황이라 이번 추경은 단행되는 게 맞다고 본다”며 “물론 야당도 추경안을 세세히 살펴 허투루 새는 돈이 없는지는 따져봐야겠지만 예전처럼 ‘밀당’으로 떡고물을 얻을 목적이거나, ‘반대를 위한 반대’ 차원에서 추경안 통과를 늦추려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 박진석·장원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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