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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마이웨이’에 난처, 미국의 대화 기류는 긍정적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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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호 05면

문재인 정부 대북관계 해법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남북 교류 재개와 관계 회복이 큰 관심사다. 사진은 평양 시민들이 지난 15일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뉴스가 실린 노동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후 남북 교류 재개와 관계 회복이 큰 관심사다. 사진은 평양 시민들이 지난 15일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뉴스가 실린 노동신문을 읽고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첫 만남은 무척 어색했다. 한쪽이 상대를 ‘적(敵)’으로 부르자 ‘어리석은 추태’라며 발끈하는 반응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열흘 남짓한 기간 벌어진 남북관계 1차 탐색전 얘기다. 발단은 지난 17일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발언이다. 취임 후 첫 부처 방문으로 국방부를 택한 문 대통령은 “우리 군은 적의 어떠한 도발도 용납하지 않고, 적이 무력도발을 감행한다면 즉각 강력히 응징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을 적으로 지칭한 것은 물론 ‘응징’이라는 표현까지 써 가며 대북 대응태세를 군에 주문한 것으로 해석됐다.

북, 문 대통령 ‘적’ 발언에 실망 #“로켓 시험발사 규탄하는 추태” #저강도 비난 담화 내며 탐색전 #도발 행보에 접촉 엄두 못 내지만 #트럼프 ‘대화 해결’ 시사 운신 여지 #고위급 접촉서 큰 틀 먼저 합의 #톱-다운 방식 대화 복원 가능성

이런 언급은 예상 밖이었다. 새 정부는 북한과의 대화와 교류협력 쪽에 무게를 싣고 출발점에 섰다는 점에서다. 문 대통령도 대선후보 시절부터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의 남북관계 경색과 대북정책에서의 이른바 ‘적폐’를 씻어내겠다는 입장을 강조해 왔다. 무엇보다 북한을 적으로 콕 집어 말했다는 건 뜻밖이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TV토론회에서 ‘북한이 주적이냐’는 보수 성향 후보들의 질문에 “대통령으로서 할 말이 아니다”고 회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김정은 정권을 감싸고 돈다는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런데 취임 일성으로 북한을 응징해야 할 적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문 대통령의 이 같은 대북기류 변화는 지난 14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처음 감지됐다.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화성-12형’ 발사 때문에 소집된 회의를 주재한 문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을 강력 규탄하며 단호하게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취임 나흘 만에 미사일 발사 도발을 강행한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한 불편한 심기가 읽혀지는 메시지였다. 사흘 뒤 국방부 방문 때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위반하는 중대한 도발이자 한반도는 물론이고 국제 평화와 안정에 심각한 도전”이라고 강조한 데서도 이런 분위기는 재차 확인됐다.

문재인 정부의 잇따른 대북입장 표명에 평양의 대남 부처들은 당혹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예상보다 훨씬 강경기류로 흘러가고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18일 조선아태평화위원회 이름으로 내놓은 입장에는 이런 분위기가 담겨 있다. 아태평화위 대변인 담화에서 북한은 “새로 집권한 남조선 당국이 이번 시험발사의 사변적 의의를 외면하고 무턱대고 외세와 맞장구치며 온당치 못하게 놀아대고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과 유엔 주도의 대북제재 움직임에 한국 새 정부가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불만이다. 담화는 문 대통령의 NSC 상임위 소집에 대해서도 “우리의 로켓 시험발사 소식이 전해지자 김관진·한민구·윤병세·홍용표 같은 박근혜 잔당들까지 불러들여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긴급 소집하고 유엔 결의 위반이니, 엄중한 도전이니, 새 정부에 대한 시험이니 뭐니 하며 그 무슨 규탄성명까지 발표하는 추태를 부렸다”고 날을 세웠다.

북한이 문재인 정부와의 남북관계 첫 단추를 비방 모드로 끼우게 된 건 노동당 대남전략가들의 실망감이 작용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지난해 말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 사태와 촛불시위, 대통령 탄핵과 대선으로 이어지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북한은 ‘문재인 당선’에 각별한 공을 들였다. 보수 성향 후보들을 싸잡아 비난한 건 물론이고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지지율 상승에도 경계심을 보이며 선동과 비방을 쏟아냈다. 문재인 후보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따뜻했던 남북관계’를 되살려 줄 것으로 북한은 희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압박 분위기 속에서 한국의 새 정부가 북한의 산소호흡기 역할을 해 주면 좋겠다는 기대도 깔려 있을 수 있다. “핵 개발이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지켜주고 있다”는 궤변으로 일관해온 북한 입장에선 문재인 정부의 대응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다.

단호한 대북 언급, 새 정부 전술적 포석

물론 북한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기대감을 접은 건 아니다. 대남비방 주체를 노동당의 하부 기구인 아태평화위 이름으로 해 격(格)을 낮추고,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탐색 수준에 그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A4 용지 3쪽 분량의 비난 담화에서 문 대통령의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않은 점이 눈길을 끈다. 향후 대화의 물꼬가 트이는 상황을 염두에 둔 포석이란 얘기다.

문 대통령의 ‘단호한’ 대북 언급도 새 정부의 기조라기보다 전술적 포석으로 봐야 한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익명을 요구한 대북부처 핵심 당국자는 20일 “대통령 탄핵이란 국면에서도 보수가 완전 궤멸하지 않고 제한적으로나마 결집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데는 북한 변수도 한몫했다”며 “김정은의 핵 위협과 미사일 도발이란 현 국면을 문재인 정부도 정책에 일단 반영해야만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른 당국자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 직후 NSC를 열고, 국방부를 방문한 국군통수권자가 할 수 있는 발언은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고 귀띔했다. 군 당국과 안보 보좌진이 마련한 ‘말씀자료’에서 크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얘기다.

문제는 향후 임기 동안 난마(亂麻)처럼 얽힌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풀어갈 것이냐 하는 로드맵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약으로 ▶북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 ▶대북제재와 대화의 병행 ▶굳건한 한·미 동맹 ▶개성공단 확장을 포함한 교류협력 확대 등을 강조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첫 정상회담과 금강산 관광 등 남북관계의 절정을 누린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이어받았던 노무현 정부 시절과는 판이하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마이웨이식 도발 행보가 가장 골칫거리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한반도 무력전개를 앞세운 강력한 경고에다 중국까지 가세한 대북압박이 이어지자 일단 6차 핵실험 같은 극단적 행동은 주춤하는 형국이다.

그렇지만 탄도미사일 도발이나 대남타격 위협 등이 겹치자 문재인 정부로서는 대화병행 카드는 꺼낼 엄두도 내지 못한다. 자칫 대화를 서두르다 여론의 반발을 살 수 있다. 집권 초반부터 대북정책 추진의 동력을 소모해 버리는 국면을 자초할 것이란 우려도 정부 안팎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북한은 “우리의 자위력 강화 조치(핵과 미사일 개발을 의미)는 미국에서 행정부가 교체되고 남조선에서 정권이 바뀌었다고 하여 중단되거나 속도가 늦춰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18일 아태평화위 담화)며 문재인 정부를 속타게 하고 있다.

새 정부 입장에서 그나마 반색할 일은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기류가 다소 누그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출범 초기 강경 일변도로 북한을 몰아붙이던 트럼프 행정부는 ‘조건부 대화’ 쪽으로 변화의 조짐을 드러냈다. 트럼프 대통령은 17일 문 대통령의 특사인 홍석현 한반도포럼 이사장과 만난 자리에서 “현재는 압박과 제재 단계지만 어떤 조건이 된다면 관여(engagement)를 통해 평화를 만들어 갈 의향도 있다”며 대화를 통한 해결 가능성을 시사했다. 대북 군사압박의 선봉에 섰던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도 19일(현지시간) 무력을 통한 북핵 문제의 해결 가능성에 대해 “만약 군사적 해법으로 간다면 믿기 힘든 규모의 비극이 될 것”이란 입장을 밝혀 신중한 쪽에 무게를 실었다.

완전한 비핵화가 아닌 ‘핵실험 중단’이란 북한 선결 조치가 취해지면 북·미 간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워싱턴 측의 시그널도 문재인 정부엔 긍정적이다. 니키 헤일리 유엔주재 미국 대사는 지난 16일 “북한의 핵 개발과 관련한 실험의 전면 중단(total stop)이 이뤄진다면 북한과의 대화에 나설 용의가 있다”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 측으로서는 공약사항인 ‘제재 국면 속 대화 병행’을 모색할 운신의 폭이 생긴 것이다.

오랫동안 지속된 남북관계 경색을 뚫어야 하는 데다 한반도 주변 정세까지 엄중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대화 복원은 ‘톱-다운’ 방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 대북 특사 파견이나 제3국에서의 고위급 비밀접촉을 통해 속도감 있게 큰 틀의 합의를 한 뒤 장관급이나 실무급 대화로 이어지게 하는 수순이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이런 방식을 통해 2차 정상회담과 주요 남북 현안을 추진한 전례가 있다. 문재인 정부의 첫 국가정보원장으로 내정된 서훈 전3차장이 “남북 정상회담이 필요하다. 조건이 성숙되면 평양에 갈 수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북, 우선 10·4선언 이행 요구할 수도

넘어야 할 산은 높고 험하다. 핵·미사일 도발에 ‘서울 핵 불바다’ 발언까지 직접 쏟아낸 김정은 위원장을 보는 우리 국민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대남 특수부대원들 앞에서 “남조선 것들 쓸어버리라”며 호언하던 김정은을 문재인 대통령이 웃는 얼굴로 마주하려면 적지 않은 정지작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파괴력이 큰 지뢰가 곳곳에 깔려 있다.

북한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에게 우선 ‘10·4 선언’(2007년 남북정상회담 합의) 이행을 요구하며 견적서를 제시할 공산이 크다. 개성~신의주 고속도로와 철도 건설, 조선협력단지 등 천문학적 예산이 투입되는 프로젝트다. 당시 합의된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정은 북방한계선(NLL) 포기 논란을 촉발시킨 민감한 이슈다. 새 대북 이슈로 부상 중인 인권 문제도 ‘유엔 결의 대북 타진’ 의혹으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를 껄끄럽게 만들었다. 박근혜 정부와 미국 등 국제사회가 이미 북핵과 미사일 개발의 자금줄로 규정한 개성공단을 재가동하는 것도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중단된 금강산 관광도 마찬가지다. 이제 막 닻을 올린 문재인호(號)의 대북 항해는 격랑을 예고하고 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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