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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여행을 맛보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32호 30면

일상 프리즘

트렌치코트 깃을 바짝 세운 한 남자가 베네수엘라 수도인 카라카스로 떠나기 위해 비행기 앞에 서 있다. 1977년 종합무역상사 쌍용(현재 GS글로벌)이 신입사원을 뽑는 광고였다. 이 광고에 매료돼 상사맨이 됐다. 이후 쿠웨이트 등 중동 지역을 돌며 시멘트를 수출했다. 미국 지사로 4년간 파견을 나갔고, 태국 방콕 지사장을 맡기도 했다. 세계를 누비며 일하고 싶다는 꿈을 이룬 것이다. 주방가전 업체인 독일 밀레의 한국 법인을 맡은 뒤에도 1년에 두세 달은 해외에서 머물었다. 그래서인지 회사를 떠올리면 출장에 대한 기억이 가장 많이 난다. 70년대 말엔 해외 여행이 자유롭지 못한 때라 여권을 갖고 있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회사 총무가 여권을 금고에 보관했다가 출장 전 날 “잘 관리하라”는 당부와 함께 수령증에 싸인을 받은 뒤 내주곤 했다.

수많은 나라를 다니다 보니 기념이 될 만한 것을 수집하고 싶었다. 처음엔 호텔에 있는 성냥갑을 모았다. 수십 개를 모았지만 흔하고 특색이 없었다. 그러다 찾은 게 티스푼이다. 방문 국가나 도시 특징이 세밀하게 디자인된 티스푼을 골라서 모았다. 커다란 코끼리가 조각된 것은 인도에서, 물의 요정 세이렌이 조각된 것은 독일 로렐라이에서 샀다. 나중엔 가족도 티스푼 수집에 동참했다.  지난 35년간 180여 개를 모았다. 티스푼을 전시하기 위해 별도로 주문해 만든 목제 진열장 4개를 식탁 옆 벽에 걸어뒀다. 가족과 식사를 하면서 여행 얘기를 꺼내거나 추억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출장 중에 기념품 가게를 돌아다니며 티스푼을 고르는 게 쉽지 않았다. 남아프카공화국에서 산 티스푼엔 늠름한 표범 한 마리가 조각돼 있다. 티스푼을 보면 남아공을 다녀온 게 맞는데 일했던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솔직히 여행의 즐거움을 안 것은 퇴직한 뒤다.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니 티스푼에도 신경이 덜 간다. 여행은 출장과 달리 무슨 일을 해야하는 의무가 없다. 시간에 쫓기지 않으니 마음이 여유롭다. 아마도 일할 때는 여유없이 바쁘게 다니다 보니 그 아쉬움을 티스푼 수집으로 달랬던 듯 하다. 이제는 마음도 시간도 여유로우니 티스푼 살 필요 없이 그 나라의 추억을 충분히 담아 오려고 한다. 그래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거나 관광지를 찾기보다 한적하고 예쁜 시골에서 일주일 이상 머물곤 한다. 그 지역의 문화를 느끼기 위해 토속음식도 챙겨 먹는다. 우리가 신토불이(身土不二)라고 하듯이 이러한 것들이 모여 그 나라 문화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엔 지인의 소개로 일본 큐슈의 구로메를 다녀왔다. 후쿠오카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져 있는 조그만 도시다. 일주일간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매일 아내와 동네 골목길을 산책하다 찻집에 들러 차와 간식을 먹었다. 낮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다. 저녁 무렵엔 대중 온천탕을 들러 하루의 피곤함을 씻어 냈다. 이곳은 600엔(약 6000원)이면 이용할 수 있어 매일 들러 쉬었다. 골프를 치지 않아도, 화려한 관광지가 아닌데도 소소한 일상에서 재미를 느꼈다. 산을 오를 때는 안 보이던 꽃이 내려올 때 보인다고 했다. 수많은 출장길에선 못 보고 안 보이던 것이 이제야 조금씩 느껴지는 듯하다.

안규문
전 밀레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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