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문제, 각각의 해결책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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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2호 14면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 (Gill Sans Ultra Bold i)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 (Gill Sans Ultra Bold i)

“그래서 무슨 폰트를 쓰면 제일 좋아요?”

유지원의 글자 풍경 :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 (Gill Sans Ultra Bold i)

종종 듣는 질문이다. 원하는 답은 아니겠지만, 만병통치약 같은 전방위적 절대 폰트가 있지는 않다. 특정한 상황에서 잘 기능하는 폰트가 다른 상황에서는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폰트 디자이너와 타이포그래퍼들은 복합적인 판단을 통해 보다 나은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훈련을 한다. 각각의 디자인 문제마다 각각의 해결책이 있다.

그래도 좋아하는 글자 딱 하나만 고르라면 빙긋 떠오르는 글자가 있긴 있다.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다.

길 산스(Gill Sans)

길 산스다! 런던에 처음 도착했을 때였다. 도시 전체가 길 산스체처럼 보여서 웃음을 터뜨리며 돌아다녔다. 런던의 풍경 속 신호등, 표지판, 창문 등에는 다른 유럽 도시들에 비해 유독 정원, 정마름모, 정사각의 도형이 자주 보였다. 도시의 이런 조형적 특성들은 길 산스체 대문자들의 짜임새 있으면서도 친근한 형태과 태생적인 듯 잘 어울리고 있었다.

길 산스는 에릭 길(Eric Gill)이 디자인한 산세리프 폰트다. 산세리프(sans serif)의 sans은 프랑스어로 without으로, 세리프가 없다는 뜻이다. 산스(sans)라고도 부른다. 한글로 치면 고딕체 계열에 속한다.

길 산스는 에릭 길의 스승인 에드워드 존스턴이 디자인한 존스턴체와 닮았다. 존스턴체는 런던 지하철에 적용돼 100년 넘도록 런던 시민들의 공공생활을 함께 해오고 있는 글자체다. 에릭 길은 존스턴체에서 영감을 얻어 꾸준히 수정해나간 길 산스체를 출시했다. 길 산스는 큰 성공을 거두면서 런던 거리의 포스터·시간표·대중 교통에 속속 등장했다. 어찌나 널리 퍼져 자주 보이던지 마치 영국의 국가 공용서체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길 산스가 꼭 영국에서만 보이는 건 아니다. 일본의 한 엘리베이터 안에서 버튼을 누르며 “길 산스네?”하던 기억이 난다. 올려다보니 미쓰비시의 상표가 보였다. 미쓰비시 엘리베이터는 버튼에 한해 길 산스체의 숫자 폰트를 쓴다. 일본만큼 자주 보이지는 않지만, 한국에서도 버튼을 누를 때 길 산스가 보이면 어김없이 미쓰비시 엘리베이터다.

1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대 디자인 속 길 산스

1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대 디자인 속 길 산스

최근에는 39세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산뜻하고 아름다운 연설대 디자인 속에서 길 산스가 눈에 띄었다. 프랑스에서는 대통령 후보가 영국 폰트를 쓰는 것이 다행히 별 문제가 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이탤릭체 소문자 길 산스가 저렇게 우아한 폰트였나 싶어 한참 봤다. 누가,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이미 익숙하던 폰트가 이렇게 새로운 매력으로 보이기도 한다.

울트라 볼드(Ultra Bold)

2 위: 길 산스 레귤러 i 아래: 두 종류의 길 산스 볼드 i (같은 에릭 길의 스케치로부터라도, 어떤 폰트 회사에서 디지털로 복원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2 위: 길 산스 레귤러 i 아래: 두 종류의 길 산스 볼드 i (같은 에릭 길의 스케치로부터라도, 어떤 폰트 회사에서 디지털로 복원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레귤러체가 초상화라면, 볼드체는 캐리커처에 가깝다는 말이 있다. 단순히 뚱뚱해지는 것이 아니라 개성이 과장되게 표현된다. 일정한 크기의 글자 공간 속에서 획들이 부풀어도 판독성을 유지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 레귤러체가 볼드체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웨이트(weight)가 커진다”고 한다. 이렇게 ‘무게’가 가중되는 방식도 여러 가지여서, 그냥 굵어지거나 두꺼워지기도 하지만 부풀어오르기도 한다. 두껍다는 씩(thick) 대신 볼드(bold)라 부르는 이름부터 그렇듯, 볼드체는 ‘대담’하게  두드러진다.

소프트웨어에서 볼드[B] 버튼을 누를 때, 그 폰트에 볼드체가 있으면 해당 볼드체를 불러오지만, 없으면 기계적인 방식으로 레귤러체를 두껍게 한 겹 입힌다. 이것을 ‘가짜 볼드체’라고 한다. 제대로 디자인된 진짜 볼드체는 둔중하게 겨울옷을 껴입은 모습이 아니라 글래머러스한 모습에 가깝다. 볼드체는 울트라 볼드(Ultra Bold)를 지나 파생 방식에 따라 각각 블랙(black), 팻(fat), 헤비(heavy) 등으로 나아간다.

소문자 i

i는 알파벳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다. j와는 한 몸에서 나온 관계다. 이런 낱글자들을 캐릭터(character)라고 한다. 이름 그대로 ‘등장인물’들 같다. i는 j와 더불어 유일하게 점을 가졌다. 이 점은 정원·타원·사각형·마름모·평행사변형·빗금 등의 형태로 다양하게 표현된다. i의 점 모양이 결정되어야 그 모양이 그대로 마침표로 간다. 이것이 체계적인 ‘파생’의 원칙이다. 마침표에서 꼬리를 단 쉼표가 나오고, 쉼표가 작은따옴표, 작은따옴표가 큰따옴표로 간다. 물음표와 느낌표 아래의 점에도 마침표가 적용된다.

3 여러 산세리프체에서 i의 웨이트를 파생하는 모습

3 여러 산세리프체에서 i의 웨이트를 파생하는 모습

4 타이포그래피 전공 수업에서 학생들의 파생 결과. 가운뎃줄 오른쪽을 보면 개인차가 다양하다.

4 타이포그래피 전공 수업에서 학생들의 파생 결과. 가운뎃줄 오른쪽을 보면 개인차가 다양하다.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  

체계적으로 잘 디자인된 산세리프체인 헬베티카 노이에체, 그래픽체, 가디언 산스체의 경우를 보면 소문자 i의 웨이트 파생 규칙이 모두 다르다. 헬베티카 노이에체는 모든 웨이트에서 키를 똑같이 유지하면서 점과 획의 간격을 점점 좁힌다. 그래픽체는 어느 순간까지는 키가 커지다가, 다음 순간부터는 점의 정원에 가까운 형태가 타원형으로 납작해지면서 점과 획의 간격을 좁히고 키를 유지한다. 가디언 산스체 역시 어느 순간까지는 키가 커지다가, 다음 순간부터는 사각형 점들의 윗높이 아닌 중심 높이를 맞추고 아래 획의 키도 커진다.

이런 파생 규칙들을 염두에 두고 다음 문제를 풀어보자. 더이상 간단하기도 어려울 듯 보이는 문제다. 길 산스 레귤러 i를 울트라 볼드로 파생하려면 어떤 모양이 적절할까?

타이포그래피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약 15분의 시간을 주고 이 문제를 풀게 하니 다양한 결과물이 나왔다. 분명 더 나은 해결책도 있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해결책도 있다.

결과물들을 벽에 붙여놓고 에릭 길이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를 해결한 모습을 보여주니, 학생들의 입에서 야트막한 웃음과 탄식이 흘러나왔다. 에릭 길은 앞서 예를 든 다른 산세리프체들처럼 체계적인 파생 규칙을 고안하기보다는, 각 웨이트의 성격에 맞게 직관적인 디자인을 했다. 그는 지성의 디자이너라기보다는 경험과 몸의 디자이너에 가까웠다.

정답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닐 때도 있다. 가장 논리적인 답이 항상 가장 좋은 답인 것도 아니다. 각각의 문제마다 각각의 해결책이 있고, 때론 즐겁고 엉뚱한 해결책이 좋은 답이 될 수도 있다. 논리와 체계는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래도 가끔 머릿속이 경직될 때, 길 산스 울트라 볼드 i를 떠올려본다. 오목한 쟁반 위 비대칭으로 놓인 구슬이 구르는 듯한, 과도하지 않으면서도 기발한 저 해결책을. 그러면 긴장이 풀리고 웃음이 나고 용기가 생긴다. ●

유지원 :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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