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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마음이 한 덩어리가 돼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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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1호 27면

오이스트라흐 트리오의 ‘대공’ 음반은 루돌프 대공의 초상화를 썼다.

오이스트라흐 트리오의 ‘대공’ 음반은 루돌프 대공의 초상화를 썼다.

1814년 4월 11일, 베토벤은 피아노 연주자로 무대에 올랐다. ‘피아노 트리오 제7번 op. 97’을 연주하기 위해서였다. 바이올린은 친구 슈판치히가, 첼로는 린케가 담당했다. 이날 연주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기 힘들지만, 베토벤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연주자로서는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an die Musik :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대공’

베토벤의 난청 증세는 점점 심해져 그의 귀에서는 서서히 소리가 사라져갔다. 아마도 이 곡은 베토벤이 온전히 듣고 또 연주한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었을 것이다. 무대를 떠나고 5년 뒤인 1819년 무렵부터 죽을 때까지 8년간은 종이에 글을 써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베토벤이 작품을 헌정한 사람은 루돌프 대공이다. 그래서 곡은 흔히 ‘대공’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오스트리아 황제의 아들인 루돌프는 베토벤의 제자 겸 후원자로 피아노 연주자였지만, 베토벤이 작품을 헌정하지 않았다면 역사에 이름을 남기기 힘든 사람이었다. 몇몇 음반이 그의 초상화를 표지로 쓰고 있어서 그는 세상 사람들이 얼굴까지 기억하는 복을 누리고 있다.

최근 음반가게에서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 LP 전집을 모시고 왔다. 그 유명한 보자르 트리오가 필립스 레이블에 남긴 녹음인데 명연주로 대접받는다. 이런 음반이 수중에 들어오면 다른 음반들과 비교하면서 점수를 매겨보는 호사를 누린다. 황제의 아들이 아니어도 세상의 모든 연주를 들어볼 수 있으니 우리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대공’의 명연주 1호로 대접받는 음반은 카잘스 트리오의 옛 녹음이다. 첼리스트 카잘스가 바이올린의 티보, 피아노의 코르토와 함께 남긴 녹음은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그러나 거의 백 년 전(1928년) 녹음이라 음향이 열악하기가 뼈만 남은 생선 같아서 전곡을 듣고 나면 귀가 아플 지경이다. 음악은 소리로 전달되는데 연주가 아무리 좋다 해도 음질이 떨어지면 의미가 반감된다.

카잘스는 1958년 병상에서 일어나자 본의 베토벤 생가에서 대공을 연주했다. 노 대가의 베토벤 순례였다. 피아노의 호르초브스키, 바이올린의 산도 베그와 같이 한 연주는 애호가의 요청으로 녹음 돼 오늘날 음반으로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자주 뽑게 되지는 않는다. 카잘스는 당시 82세의 노인이었다. 28년 녹음은 기백이라도 있지만 58년의 연주는 완성도가 떨어진다.

피아노 트리오는 연주하기 까다로운 장르다. 독주는 연주자가 개성을 드러내면 갈채를 받고, 관현악곡은 몇몇 단원이 실수를 해도 청중은 알아채지 못한다. 그에 비해 피아노 트리오는 각자 개성이 뚜렷한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가 딱 한 대씩 나서서 조화를 이뤄내야 한다. 세 연주자는 혼자 튀어서도 안 되고 실수를 숨길 데도 없다. 그러나 잘 어울리면 어느 장르보다 투명하면서도 다채로운 음향을 빚어낼 수 있다. 술자리도 그렇지 않은가. 혼자 마시는 건 금기요 둘도 좀 팍팍하지만 셋이면 가장 안정적이다. 넷 이상이면 산만해지고….

카잘스 트리오의 CD에 먼지가 쌓여갈 무렵 우연히 손에 들어온 음반이 정트리오의 연주다. 큰 기대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는데 깜짝 놀랐다. 상쾌하고 힘 있고 호흡까지 완벽했다. 음질도 뛰어나 악기들이 찰기 있는 소리를 냈다. CD라는 걸 잊게 만드는 윤택한 소리였다.

혼자 무대에 설 때 불꽃처럼 타오르던 경화는 숨을 죽인 채 낭만적인 선율을 이끌고, 명훈은 영롱한 타건으로 원래 탁월한 피아니스트임을 증명했다. 명화는 힘차고 풍성한 활로 두 동생을 넉넉히 감쌌다. 음반이 별로 없어 연주를 접할 기회가 없던 큰 누나는 놀라운 연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2악장 스케르초에서 악기들이 조잘대듯 수다를 떠는 부분에서는 세 남매가 분주히 주고받는 눈길이 보이는 듯 하다. 트리오 연주는 각자의 기교 외에 세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보자르 트리오는 어떨까. 오랜만에 카잘스의 28년 연주를 듣고, 정트리오도 다시 감상한 뒤에 그들의 LP를 턴테이블에 올렸다. 기대와 달리 걸음걸이가 사뿐하지 않다. 1악장 초반의 피아노가 어눌한 느낌이다. ‘대공’에 이어 5번 ‘유령’의 2악장을 올려본다. 음산하고 묵직해야 제 맛인데 보자르는 예쁘게 연주한다. 귀를 확 잡아채는 힘이 부족하다.

음반들을 연이어 듣고 비교하는 것은 연주자에게 가혹한 일이지만 레코드 애호가의 특권이다. 휴일에 잠옷 차림으로 세상의 특급 연주자를 모두 줄 세울 수 있다. 결과적으로 ‘대공’은 정트리오가 내 귀엔 최고다. 그렇다고 보자르가 수준이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트리오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슈베르트 트리오 2번으로 나를 눈물짓게 한 게 또 그들이다.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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