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옷은 벗었으되 말의 군더더기는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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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그는 이제 '예술'이 아닌 '철학'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에게 쏟아진 야유란 혹 전혀 파격적이지 않은 아방가르드(전위 예술)에 대한 비아냥 아니었을까.

'현대의 다빈치'라 불리는 얀 파브르의 '눈물의 역사'(10~12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를 보면서 들었던 의문이다. '알몸 노출'이라는 선정성부터 '이 시대 최고의 전위예술가'란 극찬까지, 다양한 기대와 우려가 한꺼번에 쏟아진 이 공연을 보고 난 느낌은 한가지였다. '눈물의 역사'를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지언정 '최고'란 타이틀을 붙이기엔 아직 섣부르다.

해부학을 공부한 때문일까. 파브르는 인간의 몸이 75%의 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착안해 '체액 3부작'을 만든다. 그 완결편이 '눈물의 역사'다. 그에게 삶이란 물과 건조함 간의 팽팽한 긴장과 투쟁의 연속이다. 메마른 대지를 적시기 위해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물, 즉 눈물.땀.오줌을 쏟아내지만 그 양은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우리 삶은 건조한 종말을 맞는다. 눈물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고독하다.

이 공연은 '절망의 기사''개''바위'로 명명된 세 인물이 이끈다. 절망의 기사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패배할 수밖에 없는 투쟁이지만 그는 끊임없이 외친다. 공격성과 위선을 걷어내고 양심을 되찾아 파국을 막아야 한다고. 한편 개는 오줌이라는 또 다른 눈물을 흘리며 세상을 조롱한다. 바위는 자식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눈물이다. 세 인물을 통해 파브르는 희망과 현실, 상처로 가득찬 우리의 삶을 함축한다.

파브르는 앙토냉 아르토의 영향을 받아 존재론적 잔혹을 추구해 왔다. 이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탄생을 암시하는 울부짖음, 유리병 위에 놓인 벌거벗은 육체, 긴 소매를 휘날리며 미치광이 춤으로 제의를 대신하는 인간…. 영혼에서 해방된 육체를 표현하기 위해 알몸이 되고, 그 알몸이 쏟아내는 눈물을 소중히 받아든다.

본래 '몸'으로 승부를 걸었던 파브르의 극은 최소화된 언어로 무대 위의 추상성을 강조하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어린 아이에게 설명하려는 듯 끊임없이 말을 토해낸다. 문제는 도가 지나친 반복성이다. 말의 향연은 파브르 고유의 이미지에 대한 집중을 방해할 정도로 넘쳐난다. 흰 천으로'영혼을 구하소서(Save Our Souls)'라고 쓴 마지막 장면은 이번 공연의 직설 화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총합이었다. 혼재된 형식의 예술을 통합.해체해 새로운 장르화를 꾀해 30년 전 천재로 추앙받던 파브르는 지금 고작 퍼즐 맞추기를 하고 있다. 자기 꾀에 넘어간 형국이라고나 할까. 가슴 속 깊은 곳의 감정을 찌르고 헤쳐 놓던 그의 재능이 말과 함께 허공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장인주<무용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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