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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리셋 코리아

561조 국민연금 기금, 공사로 분리해 독립 운용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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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나현철
나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국민연금, 정부 간섭 줄여야 

국민연금기금 독립 운용해야

리셋 코리아 기업지배구조분과 제안 #국민 노후 책임지는 역할 큰데 #정부·정치권, 쌈짓돈처럼 취급 #투자전문가로 기금운용위 구성해 #투자 자율 주고 실패 땐 책임 묻길 #수익률에 충실, 투자 원칙만 지키면 #기업지배구조 개선도 자연히 될 것

국민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은 높은 수익을 목표로 돈을 굴리는 게 정도다. 그러나 주요 대선후보는 국민연금을 정책의 도구로 활용하고 싶어한다. 리셋 코리아 기업지배구조분과는 국민연금이 정부 입김에서 벗어나려면 연금운용공사를 설립해 독립성을 보장해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561조원의 자산으로 세계 3 대 투자자가 된 국민연금이 잘 운용돼야 국민의 미래가 보장된다.

지난달 중순까지 경제부처와 금융권, 조선업계의 눈길은 온통 국민연금에 쏠려 있었다. 국민연금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대우조선해양의 운명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대우조선에 2조9000억원을 추가 지원하는 조건으로 채권 보유자들에게 ‘절반 출자 전환, 절반 3년 유예 수용’을 요구했다. 그러지 않으면 일종의 법정관리인 P플랜에 돌입하겠다는 압박도 했다. 요구를 받아들이면 국민연금은 채권 3800억원의 3분의 2인 2600억원을 날린다. 그렇다고 거부하면 자칫 90% 손실을 볼 가능성이 있다. 국민연금은 장고를 거듭하다 출자 전환에 동의했다. 대우조선도 일단 한고비를 넘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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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은 있었지만 과정은 정상이었다. 담당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이 자율적으로 결정할 일’이라며 침묵했다.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국민연금을 압박한 흔적도 없다. 하지만 이번 일로 국민연금의 독립성이 확보됐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이례적인 상황이 낳은 이례적인 과정이었을 뿐이다. 지금은 누군가 총대를 메고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어려운 대통령 부재 상태다.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했던 일로 복지부와 국민연금이 어마어마한 후폭풍을 맞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국민연금의 자체 결정이 가능했을까. 외부 전문가와 국민연금 관계자들 모두 고개를 가로젓는다. 청와대에서 실무자에 이르는 층층시하의 간섭 구조, 국민의 노후자금을 정부의 쌈짓돈으로 취급하는 현실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세계 3대 투자자, 삼성전자 최대 주주

중앙일보·JTBC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 ‘리셋 코리아’ 기업지배구조분과는 ‘국민연금의 독립성을 구조적으로 보장할 방안이 절실하다’고 결론 내렸다. ‘삼성 합병’과 같은 정치적 후유증만을 우려해서가 아니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책무를 맡고 있다. 적립액이 늘고 있는 지금 수익률을 조금이라도 높이지 않으면 고갈 시점이 빨라지게 된다. 국가와 국민에게 엄청난 부담을 지우지 않으려면 최선의 투자가 필수다. 수익률이라는 시장의 관점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기업 투자 때도 이런 원칙을 지키면 기업지배구조 개선도 자연스레 촉진된다.

국민연금엔 지난 1월 말 현재 561조원이 쌓여 있다. 이미 세계 3대 투자자다. 삼성전자 등 국내 상당수 대기업의 1대 주주이기도 하다. 총수 개인 지분보다 보유 주식이 훨씬 많다. 5년 뒤 1000조원, 2043년 2500조원으로 덩치가 불어나면 그 영향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 투자의 효율성에 국민의 노후와 투자 대상 기업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운영 방식엔 허점이 너무 많다. 효율적인 투자를 위한 자율성은 적고 책임 소재는 불분명하다. 정부 간섭이 너무 많아서다. 제도와 관행 모두 그렇다. 법적으로 국민연금 기금의 관리·운영권은 복지부 장관이 갖고 있다. 장관이 위원장인 기금운용위원회가 국민연금 전반을 관리한다. 국민연금도 이사회를 두고 있고 그 아래 기금운용본부 투자위원회가 있다. 국민연금 이사장은 대대로 정치권과 전직 장관들이 맡아왔다. 국민연금 이사장을 지낸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층층시하로 간섭을 받는 지금의 구조로는 거액의 기금을 효율적으로 굴리거나 제대로 책임을 묻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러다 보니 정치권도 국민연금에 눈독을 들인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국민안심채권’을 국민연금이 매입한 후 그 재원으로 어린이집·임대주택 등을 짓겠다고 공약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도 국민연금을 재원으로 ‘청년공공임대주택채권’에 투자해 차기 정부 5년간 청년들에게 25만 호의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기금 운용을 전담하는 국민연금운용공사를 분리하자는 주장이다. 남는 국민연금공단은 가입자 관리와 수납·지급 업무를 맡는다. 펀드 판매와 환매를 증권사가 맡고 운용은 자산운용사가 하는 것과 같은 구조다. 이러면 투자에 필요한 전문성과 자율성을 확보할 가능성이 커진다. 투자 실패나 정치적 외압의 책임을 묻기도 쉬워진다. 연금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런 목소리가 나온 지 10년이 넘었다. 복지부 산하 보건사회연구원도 지난해 국민연금 분리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정부 측 안엔 큰 문제가 있다. 독립성과 전문성은 조직만 분리한다고 확보되는 게 아니다. 투자 전문가들이 실질적으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복지부 안은 또 다른 층층시하 구조다. 지금의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를 사실상 독립기관으로 만들어 복지부와 기금운용공사 사이에 두자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상설 사무국과 분야별 소위까지 두고 기금운용공사의 업무를 세세하게 통제할 수 있다. 공사 이사회가 따로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중복과 비효율도 그대로다. 김우찬 고려대 교수는 “복지부 안은 지금의 국민연금처럼 정부와 이익단체가 담합해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얘기와 다름 없다”고 비판했다.

이를 피할 대안은 전문가로 구성하는 기금운용위를 공사의 최고 의사결정기구로 통합하는 것이다. 또 운용위를 투자 전문가들로 채워야 한다. 지금처럼 위원을 주요 부처 차관과 경제단체 및 양대 노총의 부위원장들이 맡아선 전문성이 확보되기 어렵다. 자율적인 투자를 보장하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할 수 있는 위원회를 구성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국민연금의 가입자 대표성은 위원 추천권을 노사정에 주는 방식으로 해결하면 된다. 박경서 고려대 교수는 “국민연금 운영은 복지 시스템이지만 기금 수익률을 높이는 건 철저히 시장의 영역에 맡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권이나 개별 부처의 개입을 줄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다. 이사장이나 공사 사장의 임기를 보장하되 국회 청문회를 거쳐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 낙하산 인사를 차단하고 전문성과 독립성을 높일 계기가 된다. 독립된 공사는 지금의 준정부기관이 아닌 기타 공공기관으로 지정할 필요가 있다. 이사회·보수·예산 등 경영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공사 사장, ‘낙하산 인사’ 막게 청문회 해야

다만 투자 실패와 배임 행위에 대한 책임은 지금보다 엄히 물어야 한다. 운용위원회나 관련 공무원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법을 위반해 손해를 입히면 강력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우자는 얘기다. 복지부 장관뿐 아니라 일정 수 이상의 가입자에게 청구권을 부여해 국민에 의한 직접 견제를 강화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김우진 서울대 교수는 “대기업에 이런저런 규제를 새로 부과하는 것보다 국민연금이 제대로 된 투자자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게 지배구조 개선에 훨씬 효율적”이라며 “국민연금이 일정 규모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하면 곧바로 회의록을 공개하도록 하는 등 투명성을 보다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현철 논설위원 tigerac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