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고 이병철회장(상)|인간의지·꿈의 실현 보여준 "집념의 거인"|말수 적지만 다정다감한 성격|조언 경청하며 직접메모, 인재살리는 용병지묘 대단|정치·문화에도 탁견… 교분넓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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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일국교정상화강조>
◇정일권씨 (전 국회의장)=호암선생을 처음 뵌것은 부산 피란시절이었다.
하루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전시상황인데도 그분은 의욕에 찬 사업확장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한 집념이 오늘날 세계의 삼성을 이룩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
5·16후 주미대사로 있을때 호암선생이 미국에 오셔서 이틀간 한방에 묵으며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고인은 한일국교정상화와 수출 제1주의를 누누이 강조했다.
오늘와서 생각하면 고인의 선견지명에 새삼 머리가 수그러질 뿐이다.
10·26이후 제네바에 가서 학교에 나가고 있을때 장문의 서신을 보내주셨는데 급변하는 시대를 헤쳐나가려면 첨단과학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부국경제해안에 탄복>
◇이민우씨 (전신민당총재)=이회장과는 경주이씨종친이어서 30여년전부터 각별한 친분을 맺어왔다.
평소 국가경영의 애국적 차원에서 경제는 물론 정치·사회·문화등을 헤아리는 혜안과 탁월한 능력에 늘 감명을 받아왔다.
뵐때마다 경제발전·나라발전을 위한 정치발전·사회안정을 당부하곤 했다.
특히 지난 정월엔 본인의 민주화 투쟁을 격려해주기도 해 당시의 잔잔한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노사분규가 심하던 얼마전 삼성만은 예외여서 다시한번 감복했었다.

<미래꿰뚫는 선견가져>
◇구자경씨 (전경련 회장)=한 군은 아니나 같은 서부경남 출신의 어른이신 고 호암 이병철회장은 나에게는 사장이신 동시에 실업계의 동향 선배이시다.
때로는 가까운 인척간의 정의를 나누기도 하고 때로는 사업상 치열한 경쟁을 펼치기도 한지난 20년간을 통해서 나는 그 분이 누구도 따르기 힘든 탁월하신 기업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렇게 믿고있다.
기업환경의 미래를 꿰뚫어 보시는 선견지명과 인재를 키우고 활용하시는 용병지묘,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생 제일을 추구하신 강인한 기업가 정신은 기업인으로서는 누구나 본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개인의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을 뿐만아니라 일찌기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발기·조직하셔서 한국재계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신 공은 길이 높이 평가될 것이다.

<모든일에 철두철미>
◇김봉재씨 (대원정기회장·국정자문위원)=이회장과는 동갑인데다 고향도 비슷해 교유한것이 벌써 50년이 넘는다.
이회장이 마산에서 양조업을 하던 시절, 나도 거기서 양조업을 하고 있었던터라 자연스레 친분을 맺게 됐다.
반세기이상 가깝게 지내면서 느낀것은 그분의 철저함이다. 무슨 일이든 허술하게 넘기는 일이 없고, 바늘구멍만한 빈틈도 발견할수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경제가 이정도로 올라설수 있게된데는 국가의 정책도 있고, 국민의 노력도 있었지만 이회장과 같은 총명함과 철저함을 갖춘 기업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그 어려운 건강상태에서도 얼마전 삼성종합기술원을 개원하는 것을 보면서 기업에 앞서 국가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그의 원대한 포부를 다시한번 절감했다.

<잔잔한미소 인상적>
◇안희경변호사 (75)=50년대 후반부터 30년을 「초지회」 「수요회」 회장으로 골프를 함께하며 형제나 친구처럼 지내왔다.
골프를 치다 김성곤·장기영씨가 자주 다툼을 벌이면 늘 이회장이 『국제심판이 판정해 봐』하고 중재를 시켰는데 이제 모두 세상을 뜨고 나혼자만 남았으니 허망한 마음뿐이다.
골프장에서도 이회장의 끝마무리는 아무도 당할사람이 없을 정도로 집념이 강해 이것이 바로 국내 제일가는 기업가의 의지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거의 말씀은 않고 웃는 얼굴로 신중히 듣기만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한마디로 좌중을 압도하곤 했다.
홀인원을 세번이나 하신것도 결코 행운이 아니었다. 이회장과 함께 텐트치고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안양골프장을 만들때가 나에게도 가장 즐거운 시절이었다.

<전문인역할강조 감명>
◇현승건 한림대학장(전성대총장)=삼성이 운영하던 성대총장을 처음 맡았을때 고인이 『나는 기업은 알지만 교육은 잘모르니 총장께서 학교운영을 알아서 처리해달라』며 전문인의 역할을 강조하던 말이 인상에 남는다.
처음엔 가까이 모시기에 까다로울 것으로 생각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적으로는 인정이 많고 다정다감하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특히 삼성이 성대에서 손을 뗀 뒤에도 개인의 신상에 관심을 갖고 걱정해주는 고인의 언행에서 인재를 키우고 대기업을 이끄는 거인의 풍모를 느낄수 있었다.

<문화예술에도 큰 업적>
◇전숙희씨(펜클럽회장)=내가 처음 이회장을 만난 것은 35년전 부산피란시였다.
문인을 좋아한다는 그분을 처음 만나게 된것은 제일제당 회사안의 자그마한 사무실에서였다. 그때 본 이회장은 맑은 눈빛의 말수적은 사람으로 의지력이 강하고 외유내강의 치밀함이 느껴졌다.
그분은 나에게 차를 권하면서 『비록 지금은 설탕장사에 지나지 않지만 언젠가는 대기업가로 성장하여 그 돈으로 문화사업을 하고 문화인들에게 창작을 위한 기반을 만들어 주겠다는 소망을 갖고있다』고 말했다. 그 후 이회장은 한국의 경제를 부흥시키는 한편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창설했고 호암박물관·아트홀·갤러리등을 만들어 문화예술을 위한 많은 업적도 세웠다. 그의 생은 인간의지와 꿈의 실현을 보여주고 남긴 승리의 삶이었고 문화를 위해 쌓은 탑도 영원하리라 생각된다.

<직접 전화로 요청>
◇임원준서울대교수 (경제학)=이회장을 처음 뵌것은 25년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지 얼마 안돼서였다.
직접 전화로 『곧 한일국교 정상화가 될 전망인데 경제적인 측면에서 한일관계에 대한 예상과 조언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서였다.
대그룹 총수가 젊은 나에게 직접 전화를 해왔을 뿐 아니라 자동차까지 보내줘 무척 놀랐었다.
회장자리에 내가 앉게 옆자리에 비켜 앉아 회장이하 전사장단이 모두 노트와 연필을 들고 경청하는 진지한 자세에 또 한번 놀랐다.
이때의 첫인상이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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