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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프리미어리그에서 배우는 스타트업 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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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함승민 경제기획부 기자

함승민 경제기획부 기자

영국의 프로축구리그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는 ‘홈 그로운(Home Grown)’이라는 제도가 있다. 유소년 시절을 잉글랜드 팀에서 보낸 선수를 의무적으로 팀 명단에 포함해야 하는 조항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국적 제한이 없다. 출신지와 상관없이 ‘잉글랜드에서 성장한 선수는 잉글랜드 선수로 본다’는 식이다. 각 팀은 이 규정을 채우기 위해 좁은 자국 땅을 벗어나 해외 유소년 발굴에도 공을 들인다. 전 세계 축구 유망주들이 EPL로 모여들고, 이들이 성장해 리그 전체의 수준을 높인다.

영국은 스타트업 생태계로도 유명하다. 정부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유럽의 창업 중심지로 떠올랐다. 이곳의 스타트업 육성 방식은 홈 그로운의 메커니즘과 비슷하다. ‘국적 불문 유망주 발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영국에는 자국인뿐 아니라 유럽과 전 세계 ‘창업 유망주’들이 모인다. 런던에서 만난 한 폴란드인 창업가는 “창업하는 입장에서 인적 네트워크가 가장 중요하다. 이곳에서는 전 세계 창업가, 개발자, 투자자, 멘토를 만나기 쉽다”고 말했다. 정부도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 런던시 관계자는 “사람이 모여야 스타트업 생태계가 조성된다”며 “정부의 첫 번째 역할은 전 세계 창업 인재가 모일만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도적으로는 비자발급 혜택, 세금 감면 등 지원책으로 세계 각국 유망 스타트업을 자국으로 유치하는 데 힘쓴다.

한국은 어떨까. 해외 창업 인재가 국내로 오는 경우는 드물다. 우수 스타트업 유치를 위한 외국인 기술창업 비자 발급은 4년간 20건에 불과하다. 정부와 유관기관이 ‘K스타트업 그랜드 챌린지’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하지만 역부족이다. 가장 큰 원인은 행정 장벽이다. 기술창업 비자 발급 요건이 선진국에 비해 까다롭고, 외국인이 법인을 설립하기도 쉽지 않다. 한국인이 해외로 나가 성공하는 것은 반기지만, 외국인이 한국에서 성공하는 것은 ‘먹튀’로 보는 사회 분위기도 무시 못 한다. 언어·문화적 어려움이나 시장 규모의 제약도 원인이지만, 한국이 최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를 갖췄고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의 ‘테스트 베드’라는 점을 감안하면 많은 장점을 썩히고 있는 것이다.

경쟁력 있는 창업생태계가 국내에 구축되려면 외부에서 인재들이 들어오고, 이들이 가진 아이디어가 활발히 공유돼야 한다. 국내 스타트업들만 온실 속 화초처럼 키웠다가는 글로벌 경쟁력이 약한 ‘우물 안 개구리’만 양산될 수 있다. 해외 인재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관련 제도를 손 봐야 하는 이유다.

함승민 경제기획부 기자 s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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