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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이선균, "재홍이만 보면 일단 웃음이 터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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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사극. 이선균(42)의 감미로운 ‘꿀성대’ 목소리를 생각하면, 그가 가짜 수염을 붙이고 조선 시대 임금을 연기하는 모습이 쉽사리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코믹 요소가 두드러진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어쩌면 이선균에게 맞춤한 ‘사극 입문작’인지 모른다.

사진=전소윤(STUDIO 706)

사진=전소윤(STUDIO 706)

처음 시나리오를 읽고 난 느낌은.

“추리 드라마로도 손색없지만, 무엇보다 예종이란 캐릭터가 매력 있게 다가왔다. 한 나라의 왕이지만,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성격 때문이다. 허세가 넘치지만, 그만큼 다재다능하기도 하고(웃음). 임금다운 카리스마와 유머 감각, 어린 시절에 대한 트라우마 등 다양한 모습이 캐릭터 안에 담겨 있더라. 마치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것 같은, 고마운 느낌을 받았다.”

사극은 데뷔 이래 처음이다.

“예전에도 사극 제안을 받았지만, 나와는 영 안 어울리는 장르인 것 같아 고사했다. 사극 특유의 억양 등 여러모로 연기하기 불편한 점이 많을 것 같았기 때문에. 하지만 나이가 드니 ‘한 번쯤 시도할 때도 됐다’는 생각이 들더라. 부담 없이 연기할 수 있는 작품을 찾고 있다가, ‘임금님의 사건수첩’을 만났다.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이거다!’ 싶었다.”

'임금님의 사건 수첩'

'임금님의 사건 수첩'

허윤미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인데.

“원작은 브로맨스 요소가 있는 순정만화다. 원작의 제목과 설정을 빌려왔지만, 영화의 장르나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만약 원작을 그대로 옮길 계획이었다면 송중기·박보검·임시완 이런 친구들을 캐스팅해야지(웃음).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이선균·안재홍에 어울리는 유쾌한 코미디 사극이다. 만약 원작 팬들이 이 영화를 보면 굉장히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웃음).”

영화 속 예종은 실존했던 조선 8대 임금 예종(1450~1469)과는 퍽 다른데.

“원작 역시 실존 임금의 이름만 빌려왔을 뿐 사실상 허구의 인물이다. 실제 예종은 열아홉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까. 영화 속 예종은 카리스마 넘치는 왕은 아니지만, 상당한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사건을 추리한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성격이라, 이서 같은 신하들 입장에선 무척 피곤한 직장 상사다.”

'임금님의 사건 수첩'

'임금님의 사건 수첩'

예종과 이서의 케미스트리가 이 영화의 핵심 요소다.

“‘버디영화’인만큼, (안)재홍이와의 호흡을 맞추는 데 가장 신경 썼다. 예종과 이서의 관계는 영국 드라마 ‘셜록’의 홈즈·왓슨 콤비와도 비슷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돈키호테와 하인 산초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사진=전소윤(STUDIO 706)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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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 기간 내내 친형제처럼 붙어 다녔다고 들었다.

“재홍이와 친구같은 사이가 돼야, 예종과 이서의 케미스트리가 영화 속에 그대로 살아날 것 같았다. 촬영 장소가 전북 전주였는데, 마땅히 할 게 없어서 둘이서 맛집도 찾아다니고 영화도 보러 다녔다(웃음). 서로 허물없이 친해지다 보니, 그제서야 생생한 연기가 나오더라. 시나리오를 보면 예종이 이서의 손을 보며 ‘전형적인 먹물의 손이구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촬영 중 재홍이의 손을 봤더니 오통통하더라고. ‘왜 이렇게 손이 뚱뚱해?’라는 대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지(웃음). 시나리오가 우리 둘의 호흡에 맞게 변한 셈이다.”

함께 연기한 후배 안재홍의 매력을 하나 꼽는다면.

“재홍이만 보면 일단 웃음이 터진다. 본인은 굳이 웃길 생각이 없는데도, 존재만으로 주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기운이 있다. ‘족구왕’(2014, 우문기 감독)부터 줄곧 안재홍의 팬이었는데, 함께 연기하면서 무척 즐거웠다.”

'임금님의 사건 수첩'

'임금님의 사건 수첩'

사극에 출연해 보니 어려운 점은 없었나.

“사극 특유의 말투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사극이라는 사실을 잊고 편하게 연기했다. 예종이 근정전에서 신하들과 국사를 논하는 장면에선 아예 다리를 꼬고 용상(龍床, 임금이 앉는 의자) 팔걸이에 삐딱하게 기댄 채 촬영했다(웃음). 임금이 24시간 ‘각’ 잡고 일하라는 법은 없잖아. 그래도 사실 좀 걱정된다. ‘사극을 그따위로 연기했다’고 욕먹을까 봐(웃음).”

촬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은.

“좀 창피한 이야긴데(웃음)…. 영화 속 하이라이트인 수중 장면을 촬영할 때, 세트장에 아내(배우 전혜진)와 두 아들을 초대했었다. 내가 등장하는 장면을 전부 찍고서 내 어깨만 나오는 배경 숏을 마지막에 촬영했는데, 그때 하필 큰아들이랑 눈이 딱 마주친 거다. 원래 얼굴도 안 나오고 대사도 없는 부분인데, 왠지 아빠 입장에서 뭐라도 더 보여줘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이 들었다. 그래서 ‘노를 저어라!’ ‘진격!’ 등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혼자 열연을 펼쳤지(웃음). 한껏 오버해서 연기했더니 나중엔 아예 목이 쉬어서 소리가 안 나왔다. 당장 다음날 촬영이 있는데. 아내에겐 잔소리를 들었지만, 아들을 실망시키기 싫었던 아빠의 마음이다(웃음).”

어느덧 데뷔 16년차다.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부터 변치 않는 신념이 있다면.

“사실 난 변변한 목표 없이 오늘까지 왔다. 훌륭한 배우가 되겠다는 꿈도, 스타로 성공하겠다는 야망도 없이 그냥 연기하는 게 행복했다. 남이 내 연기를 평가하는 건 신경 쓰지 않았지만, 스스로 평가할 때만큼은 ‘짜치는(‘모자라다’는 의미의 경상도 방언)’ 게 싫었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연기할 때마다 내 감정을 가감 없이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야만 언젠가 연기를 그만두더라도 후회가 없을 테니까.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배우의 삶이 지칠 때도 있나.

“종종 있다. 배우는 결국 감정을 연료로 삼아 캐릭터를 드러내는 직업이니까. 쳇바퀴 돌듯 바쁘게 연기하다 보면, 가끔은 내 감정이 모조리 연소돼 고갈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배우로서 가장 공포스런 순간이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을 추스르고, 여유롭게 지금 내가 마주한 역할에 충실하려고 노력한다. 돌아보면 나를 가장 행복하게 만든 것도, 지금의 나를 만든 것도 결국 ‘연기’였으니까.”

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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