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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들, 민심 잘 안다지만 정말 민심 못 읽는 것 같아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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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호 07면

[박민제 기자의 ‘민심 택시’] 8시간 운전하며 들어보니

‘만물박사’. 택시 기사들이 농담 삼아 서로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매일 20여 명의 승객을 태우고 대화를 나누며 서울 전역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만물박사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다. 우스갯소리지만 일정 부분 진실도 담고 있다. 특히 밑바닥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는 측면에선 택시 기사들은 만물박사 그 이상이다. 목적지로 가는 동안 승객과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적 특성이 지닌 힘 덕분이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얘기할 수 있는 곳”(박계동 한국택시협동조합 이사장·전 국회의원), “살아 있는 민심의 교과서”(김문수 전 경기지사)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본지 박민제 기자는 지난 19일 서울 금천구 소재 택시회사인 오케이택시에 임시근로자 형태로 취업해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다음달 9일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실제 민심이 어떤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총 8시간 동안 운행하며 들은 민심을 운행일지 형태로 재구성했다.

지혜 모아 난관 헤쳐가야 하는데 #서로 헐뜯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아동수당 10만원 받자고 애 낳겠나 #복지 재원 대책 있는지 살펴볼 것 #잘못된 소리 물리칠 수 있어야? #국민한테 적폐라는 말 안 했으면?

차고지→서울대 입구→서초동

19일 오전 11시. 대통령선거 20일 전인 이날 택시 차고지가 있는 독산사거리 교차로엔 각 정당 선거운동원들이 몰려나와 지지를 호소하고 있었다. 시내로 가기 위해 남부순환로에 접어든 뒤 서울대입구역 네거리를 지나칠 때쯤 첫 손님인 대학생 하태운(22)씨가 승차했다. 그에게 후보 선택 기준에 대해 물었다.

“불미스러운 일로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거잖아요. 청렴한 분이 됐으면 해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이면 더 좋을 거 같고요. 남은 기간 더 알아봐야죠.”

오후 1시쯤 예술의전당 앞 교차로 인근은 점심식사를 마친 직장인들로 가득 찼다. 커피잔을 한 손에 들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틈 사이로 번쩍 치켜든 손이 보였다. 급하게 차를 도보에 붙이니 이정호(52)씨가 승차했다. 법원으로 가자는 그에게 지지 후보를 물었다.

“고심 중입니다. 솔직히 마음에 드는 후보는 없어요.”

왜 그렇죠.
“유력 후보 2명 중 한 사람은 고집 때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 이상의 독단에 빠질 가능성이 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참모를 잘못 쓰면 휘둘릴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어쨌든 선택은 해야 하잖아요.
“정책을 봐야죠. 전 복지정책에 관심이 많아요. 다만 현실적인 재원 대책이 있는지도 같이 볼 거예요.”

양재동→문정동→교대역

이씨가 법원 앞에서 하차한 뒤 곧바로 한 30대 남성이 차에 올랐다. 택시 기사 입장에선 손님이 내리자마자 다른 승객이 타는 것만큼 기쁜 일은 없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그는 개인 사정을 들어 거절했다. 조용히 차를 몰고 목적지인 양재동으로 향했다. 승객이 내리고 양재동 행정법원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던 차에 손미경(45)씨가 전화 통화를 하며 택시 뒷문을 열었다. 통화를 마친 손씨에게 어떤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을지 물었다.

“도덕성을 중요하게 봐요. 그런데 이번 대선은 좀 어렵네요.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검증할 시간이 부족하잖아요.”

아쉬운 점은요.
“제가 직장인이자 아이 엄마예요. 그런데 복지 정책들 보면 실효성 없는 생색내기용이 많아요. 아동수당 만들어서 10만원씩 준다는 정책이 나오던데. 물론 월 10만원 더 받으면 좋긴 하겠지만 누가 10만원 받자고 아이를 낳겠어요. 기왕 할 거면 더 고민해서 피부에 와닿는 정책을 내놔야죠.”

손씨가 내린 뒤 잠실을 거쳐 테헤란로를 지나 시내로 돌아오는 길엔 손님이 없었다. 도로는 끝없이 밀려드는 차량행렬로 정체 중이었다. 손님 없이 가스만 태우고 있자니 애가 탔다. 한 시간여 만인 오후 4시쯤 르네상스호텔 네거리 앞에서 한진옥(37)씨가 승차했다. 한씨는 이번 대선을 보면 속이 탄다고 했다.

“정책을 설명하고 민심을 얻기에도 빠듯한 시간인데 서로 헐뜯고 있으니 답답합니다. 뭔가 사람들이 지혜를 모아서 이 난관을 헤쳐나갔으면 좋겠는데 아쉬워요. 서로 민심을 잘 안다 주장하는데 정말 민심을 못 읽는구나 싶습니다.”

어떤 대통령을 원하나요.
“민심을 잘 알아야죠. 단 옳은 소리는 잘 듣지만 잘못된 소리는 과감히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교대역→용산→신림동

교대역 네거리에서 승차한 이지훈(40)씨는 광주광역시에서 출장차 서울에 왔다가 다시 내려가기 위해 용산역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에게 광주 민심에 대해 물었다.

“1번(문재인)과 3번(안철수)이 반반입니다. 연세 있으신 분들은 1번을, 젊은 층은 3번을 많이 생각하더라고요. 문 후보가 정치적 기반도 확고하고 경험도 많으니 중장년층이 지지하죠. 또 안 후보가 2강으로 올라선 데에 보수표심이 작용했다는 측면에서 기피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당선돼도 그쪽에 휘둘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거죠.”

젊은 층은요.
“정치적으로 때가 덜 묻었고 새로운 정치를 할 것이란 기대감에 안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이 많아요.”
어떤 후보를 찍을 건가요.
“‘서민을 위한 대통령이 누구인가’가 제 기준이에요. 서민 얘기를 잘 듣고 이해해줄 수 있는 그런 분이요.”

용산역에서 차고지로 향하는 길에 승차한 이기선(56)씨는 이날의 마지막 승객이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했지만 이번엔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고 했다.

“제발 새로운 대통령은 사람들이 다투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국민한테 ‘적폐’가 뭐예요. 그 사람들은 국민 아닌가요. 그리고 그 적폐들 덕분에 이룬 것도 있잖아요. 제발 그런 말 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오후 7시. 택시 운행을 마치고 차고지를 나선 뒤 마주한 거리엔 여전히 유세차량의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같은 색깔 옷을 맞춰입은 선거운동원들은 신나게 춤을 췄으며 마이크를 잡은 이들은 저마다 “민심은 우리에게 있다”며 목청껏 국민의 한 표를 청했다. 과연 그들이 말하는 민심은 정말 거기에 있는 것일까. 아니라면 어디에 있는 것일까. 8시간의 민심 청취 뒤 강한 의문이 생겼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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