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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족을 망가뜨린 런던 테러…중상자 박씨, 뇌 수술도 못하고 기억상실 증상

중앙일보

입력

“배가 고팠나 보네…. 나트륨이 부족하다고 해서 짜게 했어, 엄마.”
20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세인트메리 병원 9층 중요외상병동. 지난달 22일 런던 의사당 근처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관광하다 차량 추돌 테러로 머리를 다친 박모(70)씨에게 막내딸 방영숙(38)씨가 미역국에 밥을 말아 건넸다.
박씨는 당시 병원으로 옮겨진 후 뇌압을 낮추기 위해 두개골 일부를 절개하는 수술을 받았다. 지난 13일 인공뼈로 대체해 덮는 수술을 받으려 했으나 출혈이 발견돼 중단됐다. 이날 재수술에 나섰지만 이번엔 나트륨과 마그네슘 수치 등이 낮아 연기됐다.
경북 영천에서 과수원 농사를 하던 박씨는 남편 방모(70)씨와 동시에 맞은 칠순을 기념해 유럽 패키지 여행에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엄마가 유독 런던에 가고 싶어했어요. 아는 분이 사시는데 공기도 좋고 살기 좋다고 했다면서요. 칠순에 딴 건 필요 없으니 유럽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해 보내드린 건데….”
자식들이 돈을 모아 보내준 효도관광의 첫 일정지였던 런던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테러의 피해를 입혀 가족을 망가뜨렸다.
그날 박씨 부부는 웨스트민스터 다리에서 양손을 아래 위로 쭉 펴고 즐거워 하며 기념 사진을 촬영했다. 사진을 찍고 남편은 가이드를 따라 버스 쪽으로 걸었지만 박씨는 셀카봉을 정리하느라 잠시 멈춰 서있었다. 비극은 그 짧은 시간에 박씨를 덮쳤다. 50m쯤 걷던 방씨가 사람들의 비명에 놀라 뒤돌아 보았을때 박씨는 외국인들과 함께 쓰려져 있었다.
돌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박씨에겐 의식이 없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뒤 두개골 절개 수술을 받았지만 일주일가량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울산에서 엄마가 테러 피해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막내 딸 방씨는 머리가 아득했다. 그는 8살, 10살 두 아이를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부랴부랴 런던으로 향했다. 옷은 두벌만 챙기고, 여행 가방엔 미역과 북어 등 엄마가 좋아할 음식들을 가득 채웠다.
의식이 돌아온 박씨는 뇌의 충격으로 왼편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눈으로 막내딸과 남편을 알아본다는 신호를 보냈다. 코와 입에 연결된 호스로 영양제를 투여하며 버티는 기간이 시작됐다.
박씨는 테러 후 2주가 지나자 왼편 손발을 움직일수 있었지만 전혀 예상 못한 복병을 만났다.
“엄마는 영천 보건소에 자신이 있는데 왜 외국인들이 보이냐고 물어보셨어요. 자식들이 다음달에 영국에 여행보내주는데 빨리 나아야 한다고도 하구요. ”
방씨는 박씨가 오래전 일은 기억하지만 테러와 그 이후의 기억은 상실한 모습을 보였다고 전했다.
박씨는 칠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역 봉사단체에 소속돼 고령의 독거노인등에게 매주 밥을 해서 전달하는 봉사활동을 했다고 한다.
시부모와 친정 부모의 병 간호도 수년간 도맡아했다.
방씨는 “엄마는 내가 애들을 두고 런던에 와 있는 걸 알면 한국의 애들 걱정부터 할 사람”이라며 “그런데 아이처럼 굴고 제가 없는 밤엔 자지 않고 소란을 피우는 걸 보면 전혀 정상으로 돌아온 게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숙박할 곳이 마땅치 않은 런던에서의 구완은 쉽지 않았다.
 현지 한인 교회와 자원봉사단체, 여행사의 도움으로 임시 거처를 구해 엄마를 돌보기 시작했다.
정작 고민은 한국으로 돌아갈 기약이 없다는 점이다.
영국 정부는 현지 치료비는 보장하지만 한국으로 돌아간 뒤에 대해선 아무런 보상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테러는 천재지변과 마찬가지로 분류돼 보험의 보상도 받지 못한다.

칠순에도 봉사 즐기던 억척 엄마 "영국과 한국 정부, 귀국 후 후유증 보상 방안 마련해주길"

방씨는 “뇌를 다쳤기 때문에 후유증이 있을텐데 한국에서 치료와 간호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그런 대책이 없을 경우 런던에서 재활치료까지 받아야 하느냐“고 걱정했다.
박씨는 딸에게 이상한 물체가 보인다고 호소하는 등 일부 치매 증상까지 보이는 중이다.
 한국에 있는 방씨의 어린 자녀들이 밤낮으로 엄마를 찾는 상황에서 가족은 궁지로 내몰리고 있다.
영천과 런던의 교회는 박씨를 위한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박씨를 돕고 있는 전공수 목사는 본지와 통화에서 “영국은 교통사고가 나도 후유증에 대해 15년간 보상을 청구할 수 있는 나라“라며 “관광을 왔다가 테러를 당해 뇌를 다친 피해자인 만큼 한국 외교부와 주영대사관이 영국 정부와 적극적인 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주영대사관 관계자는 “영국 정부와 협의하고 있으나 치료비 이상으로 지원하겠다는 얘기는 없는 상태“라며 “한국 정부 차원의 보상 등을 포함해 외교부가 입장을 밝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테러는 남의 얘기라고 여겨왔던 박씨 가족은 이역만리 병상에 누워있는 박씨를 보며 속이 타들어가고 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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