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기와·벽돌 맥 잇는 김영림·이상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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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대를 이어 전통 벽돌과 기와를 굽고 있는 김영림씨(오른쪽)와 사위 이상배씨. 왼쪽 배경 사진은 이씨가 새로 개발한 패널 공법으로 시공한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뒤뜰의 장식이다. 경복궁에 있는 '아미산 굴뚝'을 본떠 만들었다. 안성식 기자

"색시는 집에 가서 밥이나 하지 무슨 참견이야?"

공사장 인부가 툭하고 던진 이 말에 김영림(68)씨는 분해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1968년의 일이다. 우연히 경복궁에 들렀다가 건춘문 옆 담장 보수 현장을 보게 됐다. 빨간 벽돌 위에 회색 페인트를 덧칠하는 걸 보고 "왜 원래 담장 색하고 맞지도 않게 칠하세요?"라고 물었던 게 화근이었다.

우는 김씨에게 도편수(우두머리 목수) 조원제씨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대대로 도자기를 굽던 외가쪽 피를 이어 받아 경기도 광주 퇴촌면에 가마를 짓고 도자기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씨는 "그렇다면 전돌(전통 방식으로 구운 벽돌)을 한번 제대로 구워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을 건넸다.

그게 시작이었다. 1년 3개월여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기와쟁이들을 만났다. 흙 고르는 법, 가마에 불 때는 법 등을 하나하나 배워가며 전돌 굽기에 도전했다. 하지만 실패가 거듭됐다.

"우리나라 전돌 특유의 검은색이 나오질 않는 거예요. 거의 포기할 즈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죠. 장대비가 내려 가마가 무너지면서 기와쟁이들이 빼놓고 가르쳐주지 않았던 냉각 과정(전돌을 고열로 굽다가 가마의 문을 열어 식히는 것)이 일어난 거예요. 희끄무레하던 전돌들이 새까맣게 변했더군요."

그렇게 구워낸 첫 전돌은 강화도 초지진을 보수하는 데 쓰였다. 기와도 같은 방식으로 구워냈다. 일제시대 때 맥이 끊겼던 '와전(瓦塼.전통 기와와 전돌)'이 그의 손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창덕궁, 옛 국립중앙박물관 정문, 청와대 지붕 합각(지붕 양 옆의 삼각형 부분), 건축사무소 '공간' 사옥 등 셀 수 없이 많은 건축물에 그의 전돌과 기와가 쓰였다. 일본의 유명 사찰 중 하나인 나라(奈良)의 야쿠시지(藥師寺) 중수공사를 맡기도 했다.

그런데 전통을 이어간다는 자긍심 뿐 돈이 쌓이질 않았다. 일일이 손으로 작업을 해 비용이 많이 드는 데다 사업수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90년 보다 못한 맏딸 부부가 나섰다(그는 딸만 둘을 두었다). 미국서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한 딸 정혜진(45)씨가 전통과 현대를 결합시킨 문양을 개발했고, 금속공학을 공부한 사위 이상배(48)씨가 작업 공정의 기계화에 뛰어들었다.

"뒤를 잇겠다고 나선 딸 부부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질 않았어요. 흙은 어떤 비율로 섞어야 하는지, 가마 온도는 몇 도까지 올려야 하는지….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아이들 스스로 제작법을 터득했지요."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김씨는 "옛날 장인들도 제자에게 비법은 전수하지 않았다"고 했다. "혼자서 깨우쳐야 정말 자기 것이 된다"는 말도 했다.

사위 이씨가 공정을 스스로 깨치고 기계화 시스템을 갖추는 데 꼬박 8년이 걸렸다. 그는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전체 과정을 꿰뚫고 있어 직원들이 다 그만둔다 해도 혼자 해낼 자신이 있어요. 장모님도 이렇게 되길 바라신 거겠지요"라고 말했다.

2001년 재정비된 인사동 거리와 최근 복원된 청계천 광장에 깔린 전돌이 이씨가 구운 것들이다. 6일 폐막된 MBC건축박람회에선 전통 꽃담을 한장짜리 패널 형식의 기와로 간편하게 시공하는 공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장모님이 끊어질 뻔한 전통의 맥을 이으셨으니, 저는 대중화.국제화에 힘쓸 차례입니다."

신예리 기자<shiny@joongang.co.kr>
사진=안성식 기자 <ans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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