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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옥죄는 법 더 못 참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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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수영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 9일 기자간담회에서 밝힌 기업인의 '파업'(공장의 해외 이전) 발언은 그동안 쌓여온 재계 불만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준다. 첨예한 쟁점이었던 비정규직 법안이 노동계의 수정안을 중심으로 제.개정이 추진되고 있고, 국회에서 기업 부담을 늘리는 법안들이 계속 발의되고 있다는 게 재계의 불만이다. 재계는 지난해 12월 국회에서 진행 중인 각종 법안의 입법 과정에 대해 "우려할 수준을 넘어섰다"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직장보육시설 의무 설치 대상기준이 확대되고, 유.사산휴가가 법제화되는 등 일련의 법안들이 지난해 말 잇따라 국회에서 통과됐다. 주 5일 근무제가 확산하면서 기업들이 부담을 겪고 있는 시기에 태아검진휴가나 배우자 출산휴가제 도입 등과 같이 기업에 부담을 주는 내용들이 재계의 입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채 공표되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가 돼야 경제가 잘 풀리고, 그래야 일자리도 늘어난다는 게 재계의 논리다. 비정규직을 과도하게 보호하면 비정규직을 많이 쓰는 서비스업이나 중소기업의 부담이 늘어 채용 규모가 거꾸로 줄어들 것으로 재계는 우려한다. 이런 재계의 논리가 입법 과정에서 반영되지 않는 것이 재계의 불만이다. 재계 일각에서는 자조적인 목소리까지 나온다. 김영배 경총 상근 부회장은 이날 "기업 일자리는 줄고 있는데 시민단체의 일자리는 늘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말한 기업의 '파업'이 노동계나 진보 진영에서 주로 쓰는 용어인 '자본 파업'이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진보 진영에서는 자본가가 자기 이익을 관철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정부 정책을 저지할 목적으로 투자를 거부하거나 연기하고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시키는 방법 등으로 '자본 파업'을 벌인다고 비난한다. 참여정부 하에서 기업의 투자 부진에 대해 일부에서는 재계의 의도적인 '자본 파업'이 아니냐며 의혹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비판들은 설득력이 약하다. 돈이 되기만 한다면 투자를 마다할 기업가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투자를 하지 않는다고 기업을 비난할 게 아니라 노동시장 규제 등 투자의 걸림돌부터 없애는 게 중요하다고 재계는 보고 있다. 경총의 한 실무자는 "비정규직 법안의 경우 정치권이 노동계의 의견을 받아들이다 보니 애초의 정부안이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누더기가 된 것 같다"며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이 회장이) 답답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라고 말했다.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이 근로자 표를 의식해 선심성 입법을 할 경우 더 많은 기업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할 것이며, 이럴 경우 국가의 성장동력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를 밝힌 것이라고 이 실무자는 설명했다.

◆ 비난하는 노동계=노동계는 이 회장 발언에 강하게 반발했다. 정길오 한국노총 대외협력본부장은 "비정규직보호법 등은 국민 모두가 필요하다고 공감하는 법안인데, 기업의 단기적 이익에 저해된다고 파업 운운하는 것은 사회적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 의지를 버린 것으로 노사 간 대화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업이 정부가 만드는 법을 문제삼아 국민을 팽개치고 외국으로 나가겠다는 것은 국민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행동"이라고 덧붙였다. 이수봉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은 "한국 경제를 위해서라도 사회양극화를 해소해야 하는데 그런 인식이 전혀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경총은 '파업' 발언을 확대해석하지 말아 달라고 주문했다. 실제로 이 회장은 이날 노사정 간의 대화를 중시하는 발언도 했다. 그는 "한국노총이 노사정 대화에 참여하기로 한 것을 환영한다"며 "민주노총도 노사정 틀 안에서 함께 논의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잘하면 이달 안에 노사정 대화의 자리가 열릴 가능성도 있다"는 희망 섞인 발언도 했다.

◆ 현재 노동 관련 법안은=비정규직 법안은 현재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법안심사소위에 계류 중이다. 대부분의 안건에 대해 합의가 이뤄져 있으나 핵심 조항인 사용사유 제한이나 고용 의무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15일께 소위가 다시 열릴 예정이다. 민노당은 완강한 입장이나 열린우리당은 이달 내에 처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여당 관계자는 "쟁점 사항에서 사실상 의견 접근이 많이 이뤄진 만큼 잘 조율해 이달 내에 합의할 것"이라고 했다. 노사관계 선진화법안은 아직 국회로 이송이 안 됐고 정부에서 논의 중이다. 노동부는 올해 안에 이 법을 국회에서 처리할 방침이다.

김기찬.신용호.서경호 기자

*** 이수영 회장의 노사관계 관련 발언

"노동계의 합리적인 의견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겠다"

(2004년 3월 회장 취임사)

"노동자는 물론 경영자도 서로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2004년 10월 언론 인터뷰)

"노동계도 파업만능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무엇이 비정규직 근로자 보호 방안인지 고민해야 한다"

(2005년 3월 경제 5단체장 회의)

"노사정위원회나 노사정 대표자회의 같은 대화의 틀이 조속히 복원되어야 한다"(2005년 10월 노사 대토론회)

"노사갈등을 줄여나가기 위해 국가인권위가 더 이상 노사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2006년 1월 경제 5단체장 회동)

"노사관계를 대화로 해결하려 해도 노동계가 너무 바빠 만나주지 않는다"(2006년 1월 중앙일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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