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출판사 첫 책] (주)나남출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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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5월 나남출판을 열기 전 조상호(54.사진)사장은 2년 가량 '백수'로 지냈다.

71년 10월 15일 위수령 발동과 함께 제적 당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77년에 대학졸업장을 받았으나 운동권이라는 딱지가 붙은 그에게 취업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러기에 조 사장에게 출판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박정희 독재체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길이 그 외에 달리 없었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계로 들어섰다는 사실에 흥분과 두려움을 느끼며 1년 가량 방향성을 고민하던 그에게 우연히 다가온 책이 버트런드 러셀의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원제 New Hopes for a Changing World)였다. 영어권에서 51년에 출간된 이 책을 이극찬 당시 연세대 교수가 번역해 놓은 원고를 중앙일보 출판국에 근무하던 친구 이광표씨가 조 사장에게 건네주었던 것이다.

앞을 내다보기 힘든 정치상황에서 제목부터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미래 지향적인 영어 제목과 달리 번역 제목에서는 자괴감이 느껴져 안타깝지만. '갈피를 잡지 못할 오늘의 상황'이라는 제1장의 제목까지 꼭 한국과 조 사장 본인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하지만 러셀이 건드린 분야는 환경에서 인구, 전쟁, 기근, 에너지까지 실로 다양했다.

이 책으로 인해 정권의 탄압을 받지는 않았으나 곧이어 일어난 광주민주화운동이 무력 진압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조사장은 정권에 대한 희망을 놓아버렸다. 첫 책도 독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긴 잠에 빠지는 듯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1년이 더 지나서 작은 희망의 불씨가 보였다. 조 사장과는 일면식도 없던 이화여대의 소흥렬교수가 이 책을 교양과목의 교재로 선정했던 것이다. 한꺼번에 3천부나 팔려 나갔으니, 꼭 횡재를 한 느낌이었다. 이 때 생긴 조 사장의 철학이 '좋은 책은 언젠가는 빛을 본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부제였던 '희망의 철학'을 제목으로 올리고 판형을 신국판으로 바꿔 '나남신서 1호'를 붙였다.

이어 E.H.카의 '러시아혁명'과 미키 기요시의 '철학입문' 등이 나왔는데, 조 사장은 번역물에 치중한 이유에 대해 "저자로 모실 인물들을 많이 알지 못해서도 그랬지만 민족주의 등을 이야기해줄 용기를 가진 사람이 드물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쌓아올린 나남신서가 9백97번까지 기획되어 있다.

71년에 학생운동으로 제작된 1백80여 명중 정치인 유인태, 환경운동가 최열, 언론인 변용식.장성효 등 90여 명은 지금도 가끔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그 때를 추억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조 사장은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독서인이 아닌 책 생산자에게도 그대로 들어맞는다"며 "사회 상규(常規)와 맞지 않는 책을 낸다거나 건방지다는 비난을 들을지라도 20여년 전 그 때 그 열정 그대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정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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