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 80년 서울의 봄<20>|당개편대회·대학집회통해 지지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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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야당에선 지금 비토그룹 얘기가 오가고 있다. 김대중씨는 10월28일민주당을 탈당하고 새로운 정당을 만들겠다고 선언하면서 『야당 일각에서 비토그룹 운운하며 이를 대통령후보 선정의 기본조건으로 주장하는 태도를 개탄해 마지않으며, 위험천만한 발상이라고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이것이 자기가 신당을 창당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직접적이고 가장 큰 동기중의 하나라고 말했다.
김영삼민주당총재는 『나는 비토그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일이없다. 비토그룹이 군을 지칭한다면 군정종식을 위해 나만치 일관되게 투쟁해온 사람은 없다. 다만 우리 두사람은 많은 얘기를 했다. 80년 봄에도 그랬듯이 김대중씨가 제기한 문제에 대해 둘은 기탄없이 의견을 나눈 일은 있다. 그런 문제들 속에는 정국 추이와 선거 전망에 관한 모든 문제가 포함된다. 그러나 그 어느 대목도 탈당의 구실이 될수 없다』고 반박한다.
요즘 거론되고 있는 비토그룹의 뜻은 다소 막연하다. 흔히 야당 안에서 말하는 군부의 반대설을 말하는 것인지, 기업인군등 또 다른 몇개의 특정한 세력도 포함해 말하는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그 어느 것이건 특정후보를 반대하는 특정세력을 지칭한다면 비토그룹이란 말은 적절치 않다. 어느 후보에게나 지지도가 강한 세력과 반대기운이 높은 시력권은 있을 수 있고, 있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단지 반대할 뿐이지 비토권을 갖는 것은 아니다.

<"비토그룹"이 또 불씨>
그것은 어쨌든 오늘 야당가에서 말하는 비토그룹이 군부의 반대설을 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80년봄에도 야당의 심각한 관심거리였던 문제다. 80년봄은 군부의 반대설이 야당을 결속시키는 이유가 되는 듯 했는데 7년이 지난 오늘은 도리어 갈라서는 이유가 될수 있다는건 세월의 변화라고 해야할까.
80년 봄은 계엄아래서 새로운 민주정부수립이 준비되고 있었다. 계엄당국이 정치의 움직임에 공개적인 관심을 나타낸 것은 2월19일이다. 계엄사령부는 정치발전이 우리의 안보태세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서는 안된다면서 어떤 개인 또는 집단에서 정치과열 현상을 일으켜 현존하는 사회질서를 어기고 무분별하게 행동한다면 이는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계엄사령부의 이같은 성명은 상이군경회·전몰군경회·전몰군경미망인회·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등 4개단체의 현시국에 대한 건의를 받고 회신을 통해 이같은 견해를 발표했다.
이때만해도 계엄당국의 경고는 주목되지 않았다. 그 무렵은 공화당의 정풍운동과 김대중씨등의 사면·복권을 요구하는 야당의 압력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정치는 평온했다. 일부에선 사면·복권을 반대하는 당국의 의사표시라는 해석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박대통령 시해사건의 김재규등에 대한 구명운동을 경고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더욱이 그 얼마후 사면·복권도 이루어져 경고는 잊혀졌다.
그 경고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며 막연하지만 정치의 앞날에 보다 현실적인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한 것은 3월하순 부터다. 그때는 공화당과 신민당이 모두 최악의 내분속에 있었다. 김영삼 신민당총재는 과도정부의 책임자들이 이상한 개헌구상을 내놓고 정치일정을 밝히지 않는 것, 신민당의 단결을 저해하려는 폭력사태, 그리고 공화당의 정품운동등 일련의 사태는 그 배후에 조직적 책동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신민당이 내부분쟁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때도 야당의 중심문제는 사면·복권된 김대중씨가 김영삼체제의 상임고문으로 들어오느냐의 문제였다. 김대중씨는 입당의 조건으로 재야에 대한 신민당의·문호개방을 요구했다. 재야의 입당은 바로 대통령후보 지명대회의 대의원수 확보와 연결되어 있어 사실상 지명전에 대비하는 경쟁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두 계열의 이해가 날카롭게 맞섰다.
△상도동측=신민당은5·30전당대회에서 부총재 1, 정무위원 5, 중앙상무위원 30석씩을 재야 케이스로 마련해 두고 있다.
△동교동측=36석으로는 모자란다. 상무위원 정석 3백명을 4백명으로 늘려 재야가 3분의1이 되도록 해야한다.
△상도동측=그것은 당헌개정이 있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중앙상위에서 당헌개정안을 의결하고 전당대회에서 제1안건으로 하여 처리한뒤 지명대회를 하도록 고려하겠다.
△동교계측=재야에 대해서는 당헌에 구애됨이 없이 정치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

<대회중단·강행 맞서>
재야케이스의 당직을 늘리는것 말고도 재야인사의 범위와 두 파벌의 추천비율도 문제였다. 동교동측은 각계의 사람들 외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 사람은 최우선으로 대우해야 한다면서 재야인사는 김대중씨가 대표하고 있다고 했다.
반면 상도동측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옥고를 치른것만이 아니라 3선개헌과 10·17유신 이후의 투쟁도 같은 레벨에서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줄다리기 속에서 다시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지구당개편대회의 폭력사태다.
처음 남원지구당이 폭력사태로 유회되고 고창지구당이 폭력사대로 약식대회를 할 때만해도 상도동쪽은 그리 심각한 사태로 보지 않는 듯했다.
단지 이 지방의 김대중세를 반영한다는 정도로 보는듯 했다. 그랬는데 폭력사태가 김영삼씨의 강한 지지기반이라고 할수 있었던 경북지역에서 더 세차게 몰아치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
경북의 구미지구당 개편대회는 전위원장인 김창환씨가 동원한 청년들이 대회를 방해했다.
급보를 받은 경북도지부 청년당원들이 이를 진압하고 대회를 강행했다. 그랬는데 금천지구당에서도 이기한씨가 동원한 청년들이 먼저 대회장을 점거해버렸다. 이 사태를 놓고 상도동측의 당간부들은 현지에서 대책회의를 했다. 회의에선 계속되는 난동사태가 당의 이미지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일단 대회를 연기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강행론이 우세했다. 지구당의 폭력사태를 누르지 못한다면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는 어떻게 할것이냐는 얘기였다. 그말에는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아 금천대회는 강행키로 했다.
금천에선 충돌사태는 없었다. 기동경찰이 출동하고 수천명의 시민들이 대회장으로 밀려오자 점거하고 있던 청년들이 모두 후퇴했기 때문이다.
대회의 폭력사태는 중앙대회의장의 대결로 옮아갔다.
상도동측은 폭력사태의 배후를 조사해 징계해야한다고 했다.
동교동측은 개헌후에는 선거법개정이 뒤따라 사실상 현행 지구당위원장은 무의미한데도 김총재측이 대통령후보를 의식해 개편대회를 강행한 것 때문에 일어난 필연의 결과라고 주장하면서 개편의 윤곽이 잡힐때까지 개편대회를 중단하고 민주화투쟁에만 전력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상도동측은 이번6개의 지구당 개편대회는 10·26사태이전에 정무회의 의결을 거쳐 확정된것이기 때문에 지명대회전략과는 관계없는 것이라면서 남은 강릉개편대회를 비롯해 시·도지부개편대회를 예정대로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후보단일화를 추진하던 중도파는 이번 사태가 이철승연합부대가 김영삼총재측의 대회진행을 막았던 지난 76년의 각목대회 축소판이라면서 김영삼=김대중 두 지도세력의 대립을 중화시키고 사태재발을 막을 수 있는 비상대책을 강구해야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정국혼란을 초래해 정치발전에 예기치 않은 변화를 초래하는 구실이 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
김대중씨도 기자회견을 통해 신민당 사태는 김영우총재나 자신의 양대세력 싸움이 아니라고 말하고 공화당의 정품운동이나 신민당의 사태는 민주화를 가로막는 심상찮은 사태이며, 배후에는 함정이 있다고 본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폭력사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김영삼총재는 강릉개편대회에 이어 시·도지부 개편대회를 계속해 나갔다. 김대중씨도 3월26일부터 대중집회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대중씨의 첫 연설은 3월26일 YWCA목요강좌였다. 「민족혼」이란 제목으로 행한 연설회엔 1만명정도가 몰려 안팎을 메웠으며 오랜만의 대중집회라는데서 신문은 그 내용을 길게 소개했다.
김대중씨는 『6·25때 공산당에 잡혀 죽을 고비를 치렀고 71년 선거유세때 사고를 위장한 자동차충돌에서 살아났고 납치사건에서 하느님이 나를 구해주었다. 그것은 내가 언젠가 필요하니까 하느님이 나를 살려줬을 것이다.

<"신당은 온당치 못해">
나는 대통령후보 운운하지만 무엇이 되기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과 양심에 충실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다』고 전제하고 『국민과 내 양심에 충실하다가 대통령을 맡겨주면 봉사하겠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근거해 신문들은 김대중씨가 대통령후보로 나설 뜻을 명백히 선언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그 날 연설에서 김대중씨는 불출마의 가능성도 많이 얘기했다.
김씨는 『다음 정권이 대단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다음 정권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경제문제뿐 아니라 숱한 어려운 과제로 보아 남이 정권을 맡아 4년쯤 고생하고 난 다음 맡고싶다』면서 『나는 안보와 통일이 이룩되고 국민이 잘살게 된다면 중앙청 사환이 되어도 한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 연설에서『과도정부는 제2의 허정이라는 내각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나는 혼란을 원치 않는다. 폭력은 더욱 배격한다. 현정부가 과도임무에 충실한다면 최규하 대통령 개인뿐 아니라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과도정부를 도와줄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김씨는 『우리 국민에겐 세가지결함이 있다. 첫재 권력만 쥐면 남용하는 버릇이다. 내가 집권하면 대량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치보복은 없을 것이다. 둘째는 기회주의적인 행동이고, 세째는 지방색이다.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그것도 반폭으로 갈라졌는데 또 갈라져 싸워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속의 민족혼을 일깨워 80년대의 민주주의 선진국을 만드는데 합심하기 바란다』고 말을 맺었다.
그러나 둘은 국민의 지지도를 경쟁하는 듯이 보였다. 김영삼총재는 당집회를 통해 사실상 지방유세를 시작했고 김대중씨는 교회와 대학집회를 활용했다.
이윽고 김대중씨의 신민당 입당여부를 결정할 계기가 닥쳤다. 신민당 중앙상위 개최가 그 마지막 기회였다.
김영삼총재는 6개 지구당 개편대회를 모두 끝낸 3월27일 정무회의에서 중앙상무위원회를 구성, 당헌이 규정한 마지막 시한인 3월27일 회의를 소집하겠다고 선언했다. 김대중계열은 김총재측의 상위소집을 기습이라고 규정했지만 회의소집을 거부할 수 없어 정무회의서 의결됐다. 동교동계였던 송원영 박영녹 이택돈 노승환 조연하씨등은 정무회의후 대책회의를 열고 중앙상위소집을 연기하도록 요청했다.
후보단일화운동을 펴던 중간과도서명자대회를 열어 며칠간의 연기를 건의했다. 김영삼총재도 이를 받아들여 중앙상위를 4월7일로 연기했다. 이래서 문제의 중앙상위 소집일자는 두 계열의 합의를 이루었다.
대회 날짜가 정해진뒤 단일화 서명파가 중재에 나섰다. 김재광씨를 중심으로 원내 30명선의 단일화운동 서명을 받은 이들은 3월31일 두 김씨를 차례로 만났다.
김대중씨는 원칙적으로 신민당에 복당할 계획이며 신당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민당이 재야를 포함해 야당권의 구심점이 되어야하며 재야가 신당을 만드는건 바람직하지 않다. 따라서 신민당은 재야영입을 위한 제반조건을 갖추어야한다』고 말했다.
대표단은 곧바로 김영우총재를 만났다. 김총재는 김대중씨가 당에 복귀한다면 모든 문제를 협의해 협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입당기대도 물거품>
둘의 경쟁은 당내에서 이루어질 듯한 분위기속에서 4월4일 두 김씨는 호텔신라에서 단독회담을 가졌다. 상오10시30분에 시작된 회담은 2시간10분동안 계속되었다. 회담후 공동발표는 이랬다.
김영삼총재가 오는 7일의 신민당 중앙상위 이전에 김대중씨가 신민당에 입당, 재야인사의 입당을 함께 논의하고 선입당, 후당확대를 제안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씨는 재야중심의 새로운 정당창당은 신민당이나 자신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면서 원칙적으로 입당할 태도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지난 7년간 그와 행동을 같이해온 재야인사들의 입장도 있으므로 중앙상위가 끝난뒤 다시 재야인사들과 논의해 입당시기를 밝히겠다고 말했다는 내용.
이상의 공동발표후 두 김씨는 호텔로비에 나란히 앉아 회담결과를 부연설명했다. 그 내용을 옮겨보자.
△김영삼=김대중씨가 대통령후보지명대회에서 투표로 경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하여 둘이서 표대결을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김대중=우리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후보는 사전조정으로 합의되어야 한다는데 합의했으며 호양정신을 발휘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행에 말려들 위험이 있다. 나의 입당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입당후 잡음없이 일심단결하여 난국에 대처하는게 중요한데 입당한 후에도 지금처럼 불화가 계속되면 참 목적에 위배된다. 나는 문제의 근원이 지명대회를 의식하는 때문으로 여기고있기 때문에 표대결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김영삼=가장 중요한것은 아직 정국이 불투명한 상황이므로 우리 두사람이 애국심을 발휘해 협력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중앙상위 이전에 입당할 것을 요청했다.
△김대중=이번 중앙상위과정을 지켜본뒤 다시 재야인사들과 모여 신민당 입당문제를 논의하겠다.
이 만남이 있은 뒤 김총재는 김대중씨가 중앙상위 이전에 신민당에 입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름의 근거는 있었겠지만 그 이후의 사태는 그런 방향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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