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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속 패션읽기] 명품 없는 '금수저 패션'

중앙일보

입력

드라마 '귓속말'에서 대형 로펌 대표의 딸 최수연 역을 맡은 배우 박세영.

드라마 '귓속말'에서 대형 로펌 대표의 딸 최수연 역을 맡은 배우 박세영.

드라마만한 애증의 대상이 없다. 좋다고 보다가도 어느순간 삐딱해진다. '이게 현실성이 있어?'라며 옥의 티를 잡아낸다. 여주인공 옷도 그중 하나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주머니 얇은 캔디형 언니들의 옷이 매 장면마다 바뀔 때, 그리고 그 옷들이 하나같이 수십~수백 만원짜리 브랜드 제품일 때 왠지 모를 부당함이 치밀곤 했다. 기억해 보라. 통장에 몇 천원 밖에 없다던 스턴트우먼('시크릿 가든'의 하지원)도, 정규직 아나운서의 꿈을 안은 뉴스 기상 캐스터('질투의 화신'의 공효진)도, 서초동 바닥을 주름잡다 한순간 몰락한 로펌 사무장('캐리어를 끄는 여자' 최지우)도 옷만 보자면 천정부지 마이너스 카드값이 나올 터였다.

드라마 '귓속말' 대형 로펌 딸 맡은 박세영 #대중적 국내 브랜드로 럭셔리 오피스 룩 선보여 #10만원대로 '금수저 룩' 따라해볼까

SBS 드라마 '귓속말'은 그래서 눈여겨 보게 된 작품이다. 삐딱할 필요도 없이 거대 로펌이 무대요, 그 회사의 딸이 나온다. 더구나 요근래 드라마 배역이 슬슬 지루해 지던 참이 아니던가. 괴력의 처녀('힘 쎈 여자 도봉순'), 바람 난 남편을 둔 주부('완벽한 아내'), 범죄의 실마리를 찾아주는 주부('추리의 여왕')처럼 서민형 캐릭터가 줄을 잇는 요즘이다. '귓속말'의 여주인공은 분명 배우 이보영임에도, 로펌 '태백' 대표의 딸이자 글로벌 팀장으로 나오는 조연 최수연(박세영 분)에게 관심이 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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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속 태백은 막강한 네트워크로 한국 정치·경제를 주무를 만한 최대 권력집단이다. 스펙 좋은 판사 한 명의 옷을 벗기고, 고명 딸의 사위(이동준, 이상윤 분)로 삼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수연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는 여자다. 스스로를 '태백의 전시품' 같은 거라면서, 결혼 역시 거래에 불과하다고 단정짓는다. 드라마 홈페이지에서도 '몸은 명품으로, 마음은 특권의식으로 가득차 있다'고 설정된 인물이다.

핑크톤 원피스에 아이보리 더블 재킷을 짝지은 의상.

핑크톤 원피스에 아이보리 더블 재킷을 짝지은 의상.

자, 그렇다면 이제 호사로운 극중 의상들을 즐기면 될 뿐이다. 화답하듯 그는 매 회마다 목에 화려한 비즈가 붙은 원피스, 러플 장식이 두드러지는 블라우스를 입고 나온다. 하지만 '그옷 어디 꺼'라는 기사를 검색하는 순간, 예상이 깨진다. 10만~50만원 대 국내 브랜드가 주를 이룬다. 다시 삐딱해진다. '이게 현실성이 있어?'

기본 재킷이지만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줬다. 

기본 재킷이지만 노란색으로 포인트를 줬다.

이 모순은 최근 의상 협찬 분위기를 반영한다. 역할 그 자체보다 어떤 스타가 입느냐, 그리고 스타일리스트의 영향력에 따라 좌우되는 건 이미 알려진 사실. 요즘엔 의상 협찬이 점점 더 까다로워지는 추세다. 한 패션 전문 홍보대행사 대표는 "예전처럼 극 중 의상이 화제가 되고 완판 행진을 하는 사례가 줄고 있다"며 "브랜드에서는 대박의 가능성보다 최소한의 위험 부담을 덜기 위해 재벌이라도 어떤 캐릭터인지, 어떤 장면에서 그 옷을 입는지를 따져본다"고 말한다.

독특한 컬라의 실크 블라우스에 와인빛 재킷을 입었다.

독특한 컬라의 실크 블라우스에 와인빛 재킷을 입었다.

어찌됐든 시청자인 우리는 수연으로부터 얻는 게 있다. '금수저'가 아니라도 '금수저 룩'을 해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더구나 수연의 의상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사무실을 배경으로 한다. 보통 사람이 전투복으로 입기에는 화려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격식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늘하늘한 파스텔 원피스 위, 목선을 트인 블라우스 위에 어깨가 각진 더블 브레스트 재킷을 걸치는 식이다. 실루엣은 단정하되 컬러로 힘을 주는 '럭셔리 오피스 룩'의 한 끗 차이는 옆 동네 드라마 '자체발광 오피스'의 계약직 신입사원(고아성 분)을 비교해 보면 확연히 안다. 줄창 기본 블랙 재킷과 스커트만 입는 것과는 얼마나 다른가.

하지만 딱 거기까지. 금수저 룩의 '원천 기술'까지는 경계할 일이다. 제 아무리 멋쟁이들이 패션은 '태도(Attitude)'의 문제라고 해도 말이다. 수연은 남편을 면전에 두고 '존경할 수 없잖아, 금수저에 묻은 밥풀 떼먹으로 온 남자를'이라 말한다. 그 차갑디 차가운 냉소적 시선은 드라마로만 즐겨도 충분한 우리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SBS 방송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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