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비자금' 사건의 메시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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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나 죽거든 묘비에 '김대중 선생 비서실장'이라는 한마디만 써달라."

가족들에게 이렇게 얘기하곤 했던 권노갑씨다. "DJ의 그림자 인생에서 삶의 긍지를 느낀다"고도 했다.

그는 지난 1년 내내 '진승현 게이트'관련 5천만원 수뢰 혐의로 시달렸다. 그러다 지난달 초 무죄 선고를 받고는 곧장 DJ의 동교동 집으로 달려갔다. 거기서 DJ의 무릎 아래 엎어져 통곡을 했다.

그 한달여 만인 14일 두 사람은 또다시 헤어졌다. 權씨가 생애 여섯 번째로 감옥에 가면서다. 그 중 세 번은 야인(野人)시절 DJ를 모시던 죄 때문이었다.

그토록 흠모해온 DJ를 그는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40년 정치세월을 함께해온 두 사람은 이제 호적상 73세, 77세의 노인이다.

權씨를 잡아들이며 '2000년 봄 현대 비자금 사건'은 절정에 올라 있다. '대북 송금 의혹'특검에서 시작돼 '정치자금 비리'로 초점이 이동한 사건이다.

현대와 정부가 합작으로 북한에 거금을 보낸 일이 '통치행위'였느니 아니니를 따지기엔 이미 사건은 너무 멀리 왔다. 검찰 수사 결과 대로라면 그 일을 빌미로 DJ의 양 날개가 현대에서 빼먹은 돈의 액수가 너무 크고 속임수도 교묘하다. 양 날개란 權씨, 그리고 얼마 전 먼저 구속된 박지원씨다.

세풍.북풍.병풍.총풍…. 정치적 사건이 터질 때마다 풍(風)자 돌림의 이름을 잘도 지어내던 민주당도 이번엔 납작 엎드렸다. 엎드린 채 민주당의 구심이던 'DJ의 성(城)'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朴씨와 權씨의 수난은 '재건 불능'이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긴 야인의 고난을 겪은 뒤에 잡은 5년 권세의 종막치곤 허망하다. 돈의 노예가 되는 정치행태를 못 벗어난 죄다. '권불 5년(權不 5年)'이라는 메시지도 보내고 있다.

현대의 비극은 더 안타깝다. 대북 사업에 모든 걸 걸었던 황태자 정몽헌을 잃었다. 돈을 퍼준 피해자이면서도 죽음을 택한 그와, 받지 않았다고 버티는 朴.權씨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權씨가 긴급체포된 날 鄭씨 유품 일부는 금강산에 재로 뿌려졌다. 권력과 유착한 재벌 사업가가 스스로 걸어간 극단의 말로(末路) 역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 그가 유서에 남긴 회한이다.

거침없는 대검 중수부의 태도도 이번 사건의 또다른 뉴스다. '검찰은 이래야 한다'는 걸 새삼 보여주는 듯하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거물들을 제대로 손보지 못해 '이용호 특검'이니 '나라종금 재수사'니 하는 불명예를 자초했던 검찰이다.

사건은 아직 미완이다. 핵심 열쇠인 김영완이라는 사람이 미국으로 영국으로 도망다니고 있다. DJ정권 때 자주 거명됐던 조풍언씨와 린다 金이라는 여(女)거물 틈새에서 성장한 무기거래상이다. 박지원씨도 권노갑씨도 그를 '현대 돈을 중간에서 가로챈 협잡꾼'으로 지목하고 있으니 그를 붙잡지 않고는 일이 끝나지 않는다. 역시 현대 돈을 챙기고 떨고 있는 또다른 정치인들도 있다고 한다. 아직도 이렇게 정리할 건 많이 남아 있다.

사건은 늘 교훈을 던진다. "정직하라""투명하라"는 공자님 말씀 백번보다 한편의 사건이 더 생생하다.

이번 사건도 우리 사회 뭔가를 조금씩 업그레이드시킬 건 분명하다. 정치 풍토, 기업의 처신, 대북 태도 같은 것들일 거다. 온나라가 피로와 소란을 겪고 받는 대가다.

김석현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