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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객 편의시설로 전락한 야생동물 이동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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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야생동물을 위한 생태이동통로의 현실. 전북 장수의 육십령 이동통로는 돌이 깔린 등산로다.

야생동물을 위한 생태이동통로의 현실. 전북 장수의 육십령 이동통로는 돌이 깔린 등산로다.

지난달 22일 오후 전북 남원의 지리산국립공원 내 정령치(해발 1172m). 이곳은 지리산과 덕유산 생태계를 잇는 백두대간 마루금(주 능선)이다. 1988년 지방도로가 생기면서 끊겼고, 이를 잇는 생태이동통로가 지난해 11월 완공됐다. 그런데 폭이 40m도 채 안 되는 생태이동통로 중앙에는 등산로가 마련돼 있다. 등산로 한쪽엔 주차장으로 가는 계단 난간도 있고, 다른 쪽은 탐방객을 위한 전망대도 설치돼 있다. 동행한 배제선 녹색연합 자연생태팀장은 “야생동물의 이동을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등산객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시설”이라고 지적했다.

백두대간 생태 축 복원 4곳 둘러보니 #동물 길 한복판에 버젓이 등산로 #버려진 비닐봉지, 깨진 병 뒹굴어 #전문가 “사람·동물 통로 철저 분리를”

지리산 정령치엔 주차장과 휴게소가 있다.

지리산 정령치엔 주차장과 휴게소가 있다.

산림청은 2011년부터 2023년까지 지방자치단체와 함께 백두대간 마루금 생태 축을 복원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끊어진 능선을 이어 생태계를 살리자는 취지에서다. 현재 정령치 등 5곳에서 사업이 완료됐고 4곳에서 사업이 진행 중이다. 한 곳당 40억원 안팎의 예산(국비 70~100%)이 투입된다. 그런데 이러한 복원사업이 등산로를 잇는 등산객 편의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본지와 녹색연합 취재팀이 지난달 22~23일 산림청이 추진한 정령치와 전북 장수의 육십령,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한 충북 괴산의 이화령, 경북 문경의 벌재 등 백두대간 생태 축 복원이 완료된 4곳을 둘러본 결과다.

충북 이화령엔 등산객들이 설치한 리본 수십 개가 매달려 있다.

충북 이화령엔 등산객들이 설치한 리본 수십 개가 매달려 있다.

전북 장수의 육십령 이동통로 주변 곳곳에는 산악회에서 매단 리본이 나무에 달려 있었고 등산로 주변에는 비닐봉지와 플라스틱병, 깨진 드링크병도 눈에 띄었다. 경북 문경의 벌재에서도 출입금지 안내판이 붙은 야생동물 이동통로에 등산객이 드나든 흔적이 역력했다. 충북 괴산과 문경을 연결하는 이화령의 경우 4대 강 사업 때 만든 국토 종주 자전거 길이 지나면서 사람들 발길도 이어지고 있고, 바로 옆에는 커다란 휴게소까지 위치해 있었다. 배 팀장은 “주차장과 휴게소가 바로 옆에 있는데 빛이나 소음을 차단할 차단벽이 없어 동물들이 이용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유연수 산림청 백두대간보전팀 사무관은 “사람들은 낮에 이용하고 야생동물은 밤에 주로 이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폐쇄회로TV(CCTV)에 녹화된 실제 야생동물 이용상황을 알려 달라는 요구에 대해 “ CCTV 모니터링 결과가 아직 정리되지 않아 공개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상돈 이화여대 환경공학과 교수는 “사람과 동물이 함께 이용하도록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낮에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남긴 냄새나 발자국 등이 밤에도 남기 때문에 동물들이 이용을 피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사람과 동물을 떼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글·사진=강찬수 환경전문기자 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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