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님, 재단 설립 지시했나요” “그런 사실 없습니다 검사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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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님, 안종범 경제수석에게 문화·체육 관련 재단 두 개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고 지시한 사실이 있나요.”

검찰-박 전 대통령 1001호 공방 #검, 수사 통해 확보한 물증 충분 #본인 진술로 ‘부인 조서’ 확보 전략 #박, 유영하 변호사와 나란히 앉아 #재단·블랙리스트 혐의 적극 반박

“그렇게 지시한 사실이 없습니다. 검사님.”

21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특별수사본부 조사에선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의 기초 사실을 둘러싼 공방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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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수사를 맡은 한웅재(47·28기) 형사8부장검사는 미르·K스포츠재단 강제 모금 및 사유화 의혹과 관련해 “대기업 총수들에게 재단 출연을 요구한 사실이 있느냐” “최씨에게 재단 운영을 챙겨보라고 했느냐” 등 사실관계를 묻는 질문을 주로 했다.

이어 조사한 이원석(48·27기) 특수1부장검사는 대기업 경영 현안과 관련한 청탁 여부 등 처벌 형량이 무거운 뇌물죄 관련 사실을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두 부장검사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으로부터 ‘그룹 승계와 관련해 필요한 행정 지원을 해달라’는 등의 청탁을 받은 사실이 있느냐” “대기업 회장들과의 면담 일정을 사전에 최씨에게 알려주었느냐” 등을 물었다. 그러면서 안 전 수석의 업무수첩 내용,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의 통화 녹음내용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박 전 대통령의 반격도 만만치가 않았다. 검찰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서울중앙지검 1001호 조사실에서 맞은편에 앉은 검사 눈을 주시하며 ‘검사님,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재단 설립 경위는 물론 블랙리스트 작성 지시, 청와대 문건 유출, 비선 진료 등 13개 혐의 전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박했다. 수사팀 관계자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기존 입장대로 “대기업에 재단 출연금을 내 달라고 강요한 사실이 없다” “재단 설립은 사익 추구와는 무관하다” “대기업으로부터 어떤 청탁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에 속한 유영하(55·24기) 변호사가 조사실 안에서 박 전 대통령의 방어를 도왔다. 손범규(51·28기) 변호사는 외부에서 언론 대응을 맡았다. 이에 대해 검찰 간부 출신 변호사는 “전직 대통령 조사 사례를 보면 청와대 참모 라인이 동원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엔 정치권에서 인연이 있었던 인물들이 전면에서 돕는 형국이 됐다”고 말했다.

검찰의 박 전 대통령 조사와 관련해 법조계에선 “진술 확보 전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 나왔다. 박 전 대통령이 받고 있는 뇌물수수·직권남용·강요·공무상 비밀누설 등 주요 혐의는 최씨와 안 전 수석, 정 전 비서관 등을 수사하면서 확보한 물증과 진술로 충분하며,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는 형식적 요건으로 ‘부인(否認) 조서’를 확보하려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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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수사팀이 “진술을 얻는 것이 핵심”이라며 ‘영상녹화’를 포기한 것도 이런 분석과 맥락이 닿아 있다. 검찰은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박 전 대통령과 변호인에게 영상녹화에 관한 의견을 물었으나 부정적인 반응이 나오자 녹화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와 관련해 노승권 1차장검사는 기자들에게 “영상녹화는 피의자(박 전 대통령)에게 고지만 해도 되지만 우리는 답변과 진술을 듣는 게 중요하다”며 “절차적 문제(영상녹화)로 승강이하면 실체적 조사가 굉장히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검찰은 박 전 대통령과 사건 관련자들의 대질신문을 진행하지 않았다. 검찰은 이날 최씨와 안 전 수석, 정 전 비서관 등에게 출석을 요구했으나 이들은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고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노 차장검사는 “대질신문을 염두에 두고 소환하려 했던 것이냐”는 질문에 “밝히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검찰 내부에선 “박 전 대통령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조사를 받게 될지 몰라 이들이 모두 검찰 출석을 거부한 것 아니겠느냐”는 말이 나왔다.

현일훈 기자 hyun.il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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