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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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호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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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년이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제외한 모든 형제가 허공에 발길질을 하다 속절없이 스러지는 것을 보았다. 황제가 된 형이 율법에 따라 집안 형제들을 목 졸라 죽인 것이다. 어머니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파리 한 마리가 날아도 놀라서 펄쩍 뛰는 환자”가 된다. 죽음의 불안이 침입해 올 때마다 마음의 심연은 더욱 깊어지고, 보이지 않는 광기는 악몽이 되어 그를 잠식한다.


“나는 행복과 죽음 사이를 왕래하는 유혈의 시계추 속에서 몇십 년을 살았다. 나는 몹시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 어떤 속삭임 혹은 나뭇잎 사이를 배회하는 바람소리도 함부로 흘리지 않는다. 그런 중요한 습관 때문에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던 소년 #황제가 된 이후 억눌린 욕정 폭발 #내쫓긴 뒤 밀실에서 ‘자신’ 되찾아 #‘괴물’에서 ‘인간’이 되고자 결단

소년의 시종인 슐레이만의 독백이지만, 소년의 삶 또한 무에 달랐으랴. 마음을 공포에 숙주로 내준 채, 바람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조마조마하게 살아간다. 심지어 그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조차 부재한다.

우리의 잘못된 선망과 달리, 할렘은 ‘아름다운 여인들이 백조처럼 우아하게 사는 곳’이 아니다. ‘사랑과 노래와 춤의 천국’이기는커녕 ‘울음과 슬픔의 세계’이며 ‘음모와 질투의 전장’이다. 소년의 어머니 황태후는 어린 시절 궁으로 들어와 할렘의 치열한 생존장을 버티고 영광의 자리에 올랐다. 이 자리를 절대 내주기 싫어서 그녀는 세계 전체를 유혈의 공간으로 바꾸어놓는다.

심지어 마음속 모성조차 폐기한다. “남편이나 아이들은 물론, 제국 안에서 자기보다 힘 있는 여자가 있다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려고, 아예 아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황후가 생겨나지 않도록 해버린다. 아들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길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아들을 어릴 때부터 여자들과 격리한다. 그러고는 “제국의 가장 교태스러운 미소년들을 침실로 보내 동침시켰고, 결국 그녀의 아들들은 여자를 혐오하게 되었”다.

황제가 된 큰아들은 과연 걱정을 끼치지 않았고, 걸림돌이 될 후사도 없었다. 큰아들이 죽자 황태후는 자신이 이미 생명의 은인이 되었고, 또한 죽음의 공포에 쫓겨 여자를 완전히 멀리하는 소년을 황위에 올린다.

권력 중독은 이토록 무섭다. 그것은 양심을 파괴하고 인간성을 무너뜨린다. 피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도전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며, 끔찍한 독점욕을 불러일으킨다. 사람이 부대끼는 사랑의 살냄새보다 권력의 피비린내를 먼저 맡은 인간은 반드시 불행해진다. 필멸을 향해 달려가는 짤막한 인생에서 무엇이 정말로 소중한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라면서 그에게 그러한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살아감의 길에서 권력에 대한 오롯한 추구 말고는 어떠한 의지도, 욕망도 없는 인간을 우리는 ‘괴물’이라고 한다. 소년은 괴물의 희생자이자 동시에 괴물이기도 하다. 황제가 된 그는 어떠했을까.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되자마자 그는 갑자기 광기와 욕정을 해방시킨다. 친척들을 무참히 죽이고 가혹하게 탄압하면서, 자신이 느껴온 공포를 타자에게 주사할 때마다 삶의 희열을 만끽한다. “자, 누구부터 죽일까?”

동시에 억눌린 욕정이 갑자기 폭발하면서 주변의 온갖 여자를 후궁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의 욕정은 결코 만족되지 못한 채 길을 잃고 급기야 제국에서 가장 뚱뚱한 여자를 찾아 탐닉하기에 이른다. “죽음처럼 고요한, 제국을 채울 만큼 넓고 깊은 자궁 속”에 아늑히 숨고 싶었던 것이다.

황제의 폭주와 뚱뚱한 후궁에 대한 사랑에 위기를 느낀 황태후는 정변을 일으켜 아들을 내쫓고 손자를 제위에 올린다. 한때 세상의 4분의 1을 다스리던 황제는 “창문조차 봉쇄된” 방에 감금된다. 그 순간, ‘괴물 놀이’는 중지되고, 황제는 죽음에 쫓기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

신분상승을 꿈꾸는 슐레이만은 아들 황제를 죽이고 그를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슬며시 황제에게 전한다. 처음에 황제는 기뻐한다. “나의 종들이 나를 잊지 않았단 말이지! 내 권리를 찾아주려고 한단 말이지!”

그러나 내쫓긴 후 밀실에서 살면서 황제는 점차 자신의 실체와 마주친다. 전횡을 저지르는 와중에 잃어버린 것을 깨닫는다. 권력에 취해 세상을 농단했던 그는 어머니의 사랑만을 바랐던 자신이, 생명의 소중함에 몸부림쳤던 소년이 어느새 사라져 버렸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죽음의 악순환을 끊으려고, 그는 아들을 향한 음모를 중단시킨 후 스스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나는 결정을 내렸어. 절대 내 자식들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마.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일세.”

그 순간, 슐레이만은 광기로 세상을 농단했던 황제에게 다시 ‘위대한’이라는 칭호를 돌려준다. 인간으로 태어나 괴물로 살았더라도 괴물로 생을 끝내지 않고 인간으로 남으려면,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위대한’ 결단이 필요하다.

터키의 작가 줄퓨 리반엘리의 『살모사의 눈부심』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즈음 들어, 문득, 사람들과 같이 읽어 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뿐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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