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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유연성 논란 그만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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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미국은 막무가내로 버티는 그를 쿠데타로 제거하기 위해 '에버레디'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결국 휴전협정 체결이 급한 미국이 손을 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약은 태평양 지역에서 외부의 무력공격에 대한 한.미 상호 간의 공동방위 의지를 담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군사적 의미 외에도 경제적 측면에서 한국이 고도 성장을 추구하는 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회 일각에서는 "자주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침해하는 불평등 조약"이라며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평가는 긍정적이다.

이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또다시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한.미가 지난달 19일 합의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 '때문이다. '신속 기동군'형태로 전 세계 미군을 재편하겠다는 미국의 군사 전략이 주한미군에도 적용된 것이다.

전략적 유연성 협상 과정에서 한.미 간에 불협화음이 빚어졌다. 정부 내부에서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청와대 문서가 유출되는 사고가 터지기도 했다.

열린우리당의 최재천 의원을 비롯해 정치권과 정부, 사회 일각에서는 "전략적 유연성이 상호방위조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조약 위반 주장을 펴는 이들의 생각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북아 질서 재편 시기에 미국이 중국과 무력충돌했을 때 미군 발진기지인 한국의 안보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우려한다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도 지난해 3월 공군사관학교에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동북아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리가 있다. 미국의 대중국 전략이 바뀐 게 사실이다. 클린턴 정부 시절 '전략적 동반자'로 부르던 중국에 대해 부시 행정부는 '전략적 경쟁자'로 경계지수를 상향조정했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까'봐 우려할 수밖에 없는 게 한국의 현주소다.

하지만 이제는 소모적 논쟁을 접을 때다. 상호방위조약을 토대로 한 한.미동맹은 현재적 가치다. 기우(杞憂) 때문에 현재의 전략적 이익과 가치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게 국제질서의 교훈이다. 동북아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제3차 세계대전을 초래할 미국과 중국의 무력분쟁은 쉽게 예견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런 불행이 일어났다고 가정했을 때 한국이 중립지대에 있다고 과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는 더욱 의문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조선침략은 이뤄졌다. '실용적 외교안보'는 현재의 국제질서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한.미 양국 정부가 슬기롭게 정리한 문제를 지금 와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국력 낭비일 뿐이다. 동북아는 세계 4강국의 전략적 이해가 맞물린 곳이다. 한반도는 동북아의 중심지대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국가전략을 하나하나 착실하게 진행해야 한다. 중강국으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그래야만 동북아의 균형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철희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