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살아오실 줄 믿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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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꼭 살아 돌아오실 줄 믿고 있었어요.』
도서기관이 살아 돌아온다는 소식이 확인된 1일, 나흘간의 은신(?)을 끝내고 보도진 앞에 나타난 부인 정봉하씨(39)는 『그동안 확실한 석방소식을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남편이나 정부측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 보도진을 피해왔다』며 차분한 표정으로 피랍 21개월간의 고층등을 또박또박 털어놓았다.
-지금 심정은.
▲말할수 없이 기쁘다. 무사 귀환을 도와주신 주님과 정부 당국자,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확실한 생환소식을 들은 것은.
▲오늘 이른 아침 외무부로부터 남편이 제네바에 도착, 우리측 보호를 받고있으며 곧 귀국하게될 것이라는 전화를 받았다. 또 상오9시 TV뉴스를 통해 남편의 모습을 직접 보았다.
-화면을 통해 본 남편의 모습은 어땠나.
▲얼굴이 여위고 수척해보여 마음이 아팠다. 귀국하면 빨리 정상상태를 되찾도록 성심껏 돌봐드리겠다.
-피랍 상황은.
▲지난해 1월말 남편이 평소와 같이 『다녀오겠다』며 출근길에 오른뒤 몇시간 지나 『납치됐다』는 소식을 대사관측으로부터 통보받았다. 2개월후인 3월말 참담한 심정으로 아이들과 함께 귀국했다.
-남편이 피랍된 21개월간 어떻게 생활했나.
▲아이들 학업과 생활을 돌보며 조용히 지냈다. 틈나는 대로 아이들과 함께 성당에 나가 무사귀환을 빌고 또 빌었다.
-어려운 점이 많았을텐데.
▲외로왔다. 아이들이 아빠소식을 물을 때마다 『곧 돌아오신다』고 말하고는 혼자 방안에서 울었다. 특히 두번씩이나 설로 끝나버린 외신의 귀환보도 때문에 더욱 괴로웠다. 지난 국민투표때는 남편의 투표통지서를 집에 두고 혼자 투표장으로 향하면서 비통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 했다.
-신변에 이상이 있으리란 두려움은 없었나.
▲피랍된 후 처음에는 당황했으나 몸과 마음이 모두 강한 분이기에, 또 주님의 보살핌이 있을 것이기에 무사할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경제적 어려움은.
▲외무부장관이하 직원들이 도와주었고 남편의 해외 봉급이 직접 지급돼 여유있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동안 격려전화나 위문은.
▲외무부 동료직원들이 자주 찾아와 위로해주었고 동네주민과 친척·친지들이 종종 들르거나 전화를 걸어와 큰 위로를 받았다.
-지난달 28일 첫 석방소식 보도 후 줄곧 잠적했었는데.
▲잠적이라기보다 확신을 갖지못하는 상태에서 보도진을 만날수 없어 그날부터 가까운 친구집에 가 이틀을 보낸 뒤 외무부로부터 『석방이 거의 확실시된다』는 전화를 받은 30일낮 집에 돌아왔다. 집에 온 뒤에도 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출입을 하지 않았다. 초조한 시간이었다.
-남편이 돌아오면 어떤말을 할 것인가.
▲아무 말도 못할것 같다. 눈빛만으로도 사무친 그리움과 고통·반가움이 통할 것이다.
-현지에서의 생활은.
▲교포들이 많지 않은 곳이라 외부 접촉이 거의 없는 가족위주의 조촐한 생활이었다.
휴일엔 가끔 남편·자녀들과 함께 쇼핑·관광을 즐기기도 했으나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이들을 근처 아메리컨 커뮤니티 스쿨에 등·하교 시키는게 하는 일의 대부분이었다. 외교관이라는 직업이 겉으론 화려한 것 같지만 근무지의 잦은 이동으로 인한 자녀교육문제와 이웃생활의 공백 등 어려움이 많다. 그러나 외교관의 아내가 된 것을 한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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