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수탈에 맞서 첫 여성항의시위 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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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지나간 일인데…. 허허 그 땐 참 대단했었지."

첫번째이자 최대 규모로 평가받는 제주 해녀 항일투쟁사건(1932년)의 주역인 김옥련(金玉蓮.96.부산시 영도구 대교2동.사진)할머니. 아흔을 넘겨 거동이 불편하지만 지금도 70여년 전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金할머니는 요즘도 당시를 생각하며 "우리는 가엾은 제주도의 해녀들…"로 시작하는 '제주 해녀의 노래'를 부르곤 한다. 金할머니에게서 들어본 당시 사건의 진상은 이렇다.

30년대 들어 일제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당시 제주 어업조합장이자 제주 도사(島司.현 도지사)였던 일본인 다구치(田口)는 해녀를 상대로 입어료를 받고 어획물 판매권을 독점하는 등 수탈의 강도를 높여갔다. 이에 견디다 못한 1천여명의 제주 해녀는 32년 1월 북제주군 구좌읍 세화리 주재소를 순시나온 다구치를 포위하고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해녀 소녀회장이었던 金할머니가 해녀회장인 부춘화(夫春花.95년 작고)할머니와 주동해 벌인 일이었다.

이 시위 이후 1백여명의 연루자가 체포되는 등 검거 선풍이 불었고, 한달여간 제주 전역에서 연인원 1만7천여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31~32년 제주 해녀들의 항일시위는 2백38차례나 계속됐다.

"해녀의 권익을 지켜줘야 할 조합장이자 도사라는 사람이 자기네 일본인 뱃속만 불리는 일만 하는 데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그때 야학소의 선생님들이 가르쳐준 민족의식이 발동한 거지."

이 일로 목포경찰서로 붙들려가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金할머니는 그 후 부산으로 삶터를 옮겨 78세 때까지 부산 국제시장에서 포목상으로 삶을 꾸려왔다.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손자 한승우(韓承宇.41)씨는 "장사하실 때 자동차라면 손사래를 치며 언제나 30분 거리를 꼿꼿이 걸어서 가게로 나갔다"고 기억한다.

金할머니는 이화여대 행정학과 교수인 한인숙(韓仁淑.63)씨 등 1남2녀를 뒀다.

정부는 오는 15일 광복절 때 金할머니와 작고한 夫할머니에게 건국훈장 포장을 수여한다.

또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사업회(회장 김전근)의 꾸준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이념 논란으로 수여를 미뤄왔던 해녀 항일투쟁의 청년결사체인 '혁우동맹'의 문도배(文道培.1908~1953).한원택(韓遠澤.1912~1938)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준다.

글=양성철, 사진=송봉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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