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DJ납치사건 정치적 해결하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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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대통령께서도 당신 입장이 난처하지 않도록 배려할테니 이제 앞으로 김대중 사건은 완전히 잊어 달라”(김종필 총리)
“이제 이 문제는 ‘파’(par:골프용어,여기선 아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라는 의미로 쓰임)로 합시다”(다나카 가쿠에이 총리)

1973년 11월2일 일본 총리관저. 한국과 일본,두 나라의 총리가 나눈 대화다.당시 한일 양국간 외교 갈등으로까지 번진 ‘김대중(DJ) 납치사건’은 이렇게 해서 발생한 지 88일만에 정치적 해법으로 일단락됐다.

이번에 공개된 외교문서에는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정치적 타결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다나카 총리간에 주고받은 친서, 김종필총리(JP)와 다나카 총리간 대화록이 담겨 있다.
당시 박 대통령은 친서에서 “최근 의외에도 김대중 사건이 야기돼 일시적이나마 양국 사이에 물의가 생긴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이며,본인은 각하와 귀 국민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는 바”라고 적었다.이 친서는 JP-다나카 회동에서 전달됐으며,다나카 총리는 “이번에 김종필 총리를 아국에 파견해 대통령 스스로 유감의 뜻을 친서로 전하고 우호관계 증진에의 기대를 해준 데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고 화답했다.
JP-다나카 회동에선 더 솔직한 얘기가 오갔다.다나카 총리는 납치에 관여한 혐의를 받고 있던 주일대사관 김동운 서기관 문제와 관련해 “김동운의 행위에 공권력이 개재된 것이 판명되면 새로 문제 제기를 할 수 밖에 없다”고 하자 JP는 “꼭 그렇게 하겠다는 건가,다테마에(겉치레)로 얘기해 두려는 건가”라고 묻는다.다나카 총리는 “다테마에”라고 대답했다.일본 정부도 사건의 철저한 진상 규명보다는 적당한 타협을 원한 셈이다.
다나카 총리는 “김총리의 방일로 명분이 좋아졌다.이것을 계기로 끝 맺기로 하자”면서 “수사본부는 서서히 눌러가면서 없애겠다”고 말한다.특히 다나카 총리는 한일관계의 뜨거운 감자격인 야당 지도자 김대중에 대한 껄끄러운 시각도 드러낸다.
그는 DJ의 향후 거취에 대해 “일본에는 오지 않을 것으로 본다”며 “이 사람이 그 만한 정치적 센스도 없으면 장래성도 없는 사람으로 본다”고 말했다.“일본에 올 경우 내쫓겠다”고도 했다.

◇ DJ 납치 정부개입 의혹 보고한 유엔위원회=당시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는 한국 정부가 납치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담은 보고서를 유엔에 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최상급 비밀로 분류된 이 보고서는 사전 전모가 드러나지않은 8월15일 작성됐으며 당시 위원회 사무국장인 오즈브든씨가 유엔본부에 보냈다. 이 보고서에는 “1971년 대통령 선거때 46%의 지지를 얻고 망명생활을 하는 야당지도자를 아마 한국정보기관에서 납치했을지 모른다”며 “한국에 CIA(중앙정보국)와 같은 기관이 몇 개 있으며 그 기관들은 납치할 수 있는 능력,방법과 요원을 갖고 있다”고 적었다.그러나 보고서는 조총련의 소행일 가능성,자작극일 가능성 등도 함께 담고 있어 근거를 가진 주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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