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읽기] 글꼴·디자인 속의 '아시아 DN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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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아시아의 책·문자·디자인
스기우라 고헤이 엮음,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368쪽, 2만5000원

그래픽디자이너 안상수, 북 디자이너 정병규, 일본의 그래픽디자이너 스기우라 고헤이…. 세 사람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면 당신은 책을 그 몸까지 사랑하는 애서가일 가능성이 높다. 글꼴.북 디자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과, 중국의 뤼징런(북 디자이너), 대만의 황융쑹(아트디렉터), 인도의 R. K. 조시(글꼴 디자이너), 키르티 트리베디(그래픽 디자이너) 등이 '아시아의 책과 문자와 디자인'을 논했다. 좌장은 스기우라 고헤이가 맡았고 형식은 대담과 정담(鼎談). 공유하는 기본 철학은 '다(多)주어적 공동체'로서의 아시아다.

2003년 중국 베이징에 모여 아시아 문화의 속살인 문자와 책 그리고 디자인을 주제로 대담을 나누는 중국의 뤼징런(左), 일본의 스기우라 고헤이(中), 한국의 안상수씨.

전제는 이렇다. 아시아의 얼굴, 아시아의 마음 같은 어떤 공통된 규칙이 있으며, 아시아인의 신체와 마음은 범아시아적 문화가 담긴 기억의 집합소이다. 언어와 시각적 감수성의 측면에서 아시아 각국은 오랜 소통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서로가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다. 주어가 여럿이라서 하나의 주어가 다른 주어를 배제시키지 않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양상, 사뭇 매력적인 아시아의 문화 지형도다.

이들 아시아의 디자이너들은 한글.한자를 비롯한 아시아 문자나 이모티콘.암호들이 인터넷에서 활약한다면 새로운 문자 체계가 가능하리라 전망하기도 한다. 또 한자적 상상력과 전통적인 책 만들기에 뿌리를 둔 새로운 조형성의 탄생을 도모한다. 아시아 민간문화 요소들을 항목 별로 정리하여 전통문화 유전자 라이브러리를 구상하기도 하고, 인도 고문자의 조형성과 고전 텍스트의 철학과 정보기술 사이의 만남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런 시도와 구상이 소통하는 모습 자체가 이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아시아의 대표적 디자이너들이 자기 분야를 주제 삼아 나눈 한담의 기록일까? 그 이상이다. 사실 동아시아 담론, 아시아 태평양 지역 신질서론 등이 무성하지만, 그 담론의 핵심은 지역안보, 국제정치 및 경제, 시민사회이니 막상 문화는 빠져있다. 한류 담론이 있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 책의 디자이너들은 맹자의 말을 빌려 되물을 것 같다. '하필 이익을 말하느냐?'

그들의 관심은 산업.상품으로서의 문화가 아시아인들이 공유하는 문화적 기억과 소통의 경험 그 자체를 창조적으로 되살릴 수 없겠느냐는 지극히 문화주의적인 질문과 모색이 이 책이다. 사실 아시아의 새로운 문화 지형도에 대한 전망이 빠진 아시아 담론은 얼마나 부박한 것인지. 스기우라가 말하듯 일본의 문화 유전자가 어디 일본만의 것이겠는가? 과거의 재발견, 문화적 기억의 재현, 창조적 소통….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런 주제들이 디자이너들의 손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다.

"인도는 불교나 인도철학을 통해 고대 일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한자를 비롯해 국가와 문화의 기초가 된 다양한 요소가 사람과 함께 일본에 들어왔다. 나라.헤이안 시대 일본 문화를 형성한 수많은 요소가 한국인들의 손으로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본인의 핏줄에는 이 세 지역 문화의 강력한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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