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중앙포럼

환율 비명 안 들리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지난달 18일 노무현 대통령은 신년 연설을 이렇게 시작했다. 노 대통령은 "더 반가운 것은 내수가 살아나고 있습니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이제 내수가 살아나면 서민 여러분의 체감경기도 좋아질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대통령은 이처럼 경제 전체가 잘 가고 있다고 보면서 다만 내용상으로 심각한 것은 '양극화 문제'라고 밝혔다. 또 서민생활의 핵심은 부동산과 사교육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기업들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삼성과 LG, 현대.기아차그룹 등 잘나가는 대기업들이 일제히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했다. 환율 때문이다. 연말 1000원을 넘던 원-달러 환율은 최근 960원 수준까지 떨어졌다. 수출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원-엔 환율은 더 많이 떨어졌다. 수출 마지노선이 곧 무너진다는 비명이다. 중소기업들은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유가 상승세도 좀체 멈출 것 같지 않아 올해 우리 경제의 최대 관심사는 '환율과 유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들은 환율의 급격한 하락을 막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강하지 않은 것 같다고 울상이다. 정부는 "그렇지 않다"고 펄쩍 뛰지만, 시장 상황을 보면 기업들의 불만에 일리가 있다. 환율 하락을 무작정 막을 수는 없지만, 외환 당국은 환율이 요즘처럼 널뛰지 않고 안정적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강력한 의지를 시장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외환 당국은 이런 일을 할 생각이 없거나 할 능력이 없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곳곳에서 들린다. 오죽하면 산업자원부 무역담당국장이 "왜 외환시장에 개입하지 않느냐"고 외환 당국을 비난했을까.

외환 당국 입장에서는 시장에 적극 개입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 있다. 2004년 환율 하락을 막기 위해 과도하게 외환시장에 개입했다가 손실을 보는 바람에 지난해 혼쭐이 났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에 대해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대기업의 수출만 도와주고 있다"는 식으로 비판한 야당 국회의원도 있었다. 국회가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을 공개적으로 비판해 외환 당국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희한한 광경이었다.

환율과 유가 대신 대통령이 주문한 양극화와 부동산 문제에 대해선 정부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연초부터 세금 문제로 온통 시끄럽게 만들더니 엊그제는 대통령 주재로 총리와 당.정.청 수뇌부가 모두 모여 재건축 아파트 문제를 논의했다.

그러나 정부가 내놓은 양극화와 재건축 아파트 대책은 구조적인 접근보다는 대증(對症)요법에 그치고 있다. 그동안 서랍 속에 묵혀뒀던 대책을 이것저것 끄집어내는 듯한 모습이다. 저출산과 양극화 대책용 돈을 마련하려 줄이겠다는 1~2인 가구 추가공제 등 소득세 비과세.감면 축소 방침은 또 다른 형평성 시비를 불러왔다. 재건축 아파트 소유자는 '투기꾼'이므로 때려잡아야 한다는 시각에서 나오는 대책은 몇 년 뒤 부동산 시장의 수급을 왜곡시킬 수밖에 없다.

양극화와 부동산, 사교육비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면서도 시급한 것은 당장 경제에 주름살을 안겨줄 환율과 유가 문제다. 정부가 환율과 유가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지 의아할 정도다. 양극화와 부동산 문제에만 매달리다 '좋아지고 있는' 경제를 망치지 않을까 걱정이다. 환율 하락과 유가 상승은 중소기업에 더 큰 피해를 끼쳐 양극화를 심화할 수도 있다.

이세정 경제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