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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루시드 드림', 고수라는 꿈에 빠질 시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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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현실인가, 꿈인가. 시계의 초침을 봐야 알 수 있다. 초침이 움직이면 현실이고, 그렇지 않으면 꿈이다. 3년 전 눈앞에서 아들 민우(김강훈)를 데려간 범인을 잡기 위해 루시드 드림(Lucid Dream·스스로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채로 꾸는 꿈), 즉 자각몽(自覺夢)에서 그 단서를 찾아 헤매는 대호. 그의 마음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건, 현실에서나 꿈에서나 마찬가지다. 민우를 되찾겠다는 그 집념이야말로 SF영화 ‘루시드 드림’(2월 22일 개봉, 김준성 감독)을 끝까지 달리게 만드는 힘이다.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SF영화를 자식 잃은 아비의 부성애로 뜨겁게 끌어안는 중책을 배우 고수(38)가 맡았다. 그는 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내내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루시드 드림' 고수 인터뷰

“오늘따라 좀 멍하다. 이거 설마 루시드 드림? 하하하하.” 몸이 으슬으슬하다는 고수를 보며 감기 기운이 있나 했는데, 그가 먼저 이런 농담을 건넨다. 17세기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남한산성’(황동혁 감독)을 찍느라 기른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고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루시드 드림’의 대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2년 전 찍은 ‘루시드 드림’의 기억을 불러오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꿈으로 빠져드는 시간이랄까.

꿈속을 헤매는 SF 스릴러. 그간 한국 상업영화에서 잘 시도하지 않았던 장르다. 고수를 이 영화에 끌어들인 건 그 색다른 장르는 아니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꿈속 장면이 (영화에) 과연 어떻게 나올까’ 기대하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생생하게 다가온 건 하나뿐인 아들을 유괴당한 대호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자각몽에 빠져드는 그 마음, 절박함이었다. 그 먹먹한 느낌을 연기로 잘 살리면 현실에 발붙인 SF영화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호라는 인물을 생각하면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깡으로 버티는 그 피폐한 상태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말하는 고수. 단지 캐릭터의 심리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대호는 민우와 단둘이 놀이공원을 찾아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민우를 납치당한다. 이 영화는 그로부터 3년 뒤로 시간을 건너뛴다. 그동안 피 마르는 심정으로 살았을 대호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고수는 촬영 전 10㎏을 찌운 채로 극 초반 장면을 촬영했다. 그리고 촬영 중반쯤에는 일주일 동안 다시 10㎏을 뺀 다음, 3년 뒤 장면을 소화했다. 그게 다가 아니다. “죽기 살기로 민우를 찾는 일에 매달리는 대호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피폐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극 후반 장면을 찍을 때 일부러 음식을 거의 먹지 않다시피 했다. 그 상태를 몇 달 동안 유지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이 말을 하는 순간, 고수의 얼굴에 가슴 아픈 기억이 하나 지나가기라도 하는 듯했다. “그래서 발성이나 호흡에서 빈틈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기술적인 부분을 챙기는 것보다 대호의 절박함, 힘에 부치는데도 계속 달리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다.” 그 질주의 목적지는 이 영화의 마지막, 꿈과 현실을 가르는 기로에 선 순간 대호의 커다란 몸부림을 향해 간다. “그전까지 대호의 감정을 진실하게 전달하다 그 장면에서 감정을 폭발시켜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실제로 두 자녀의 아버지다. 다섯 살 아들과 세 살 딸의 아빠. “아이가 생긴 후 빨리 아버지 역을 맡고 싶었다. 아버지 캐릭터를 바라보는 느낌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나서 무엇이 가장 달라졌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웃으며 되묻는다. “내 얼굴에 ‘아버지’라고 쓰여 있지 않나? 확 티 나지 않나?” 글쎄. 잘생긴 이목구비, 우수에 찬 눈동자, 선한 인상. 우리가 그에게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순수함이 아닐까. 아버지가 됐음에도 여전히. 이 말을 듣더니 그가 하하 웃는다. “근데 뭐가 순수한 거고, 뭐가 추악한 걸까? 선한 게 뭐고, 악한 게 뭘까? 그걸 규정할 수 있을까? 난 잘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그는 자신과 가장 많이 닮은 캐릭터로 판타지영화 ‘초능력자’(2010, 김민석 감독)의 규남을 꼽는다. 폐차장에서 일해 하루하루 먹고살지만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 그래서 초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는 초인(강동원)에게 휘둘리지 않는 유일한 사람. “규남은 그 당시의 나와 정말 비슷한 생각을 하는 인물이었다. 우리 사회는 자꾸 사람들로 하여금 똑같은 곳을 바라보게 하고, 같은 생각을 하게 만들지 않나. ‘거기서 벗어나면 안 되는 걸까.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들. 돌아보면 그때가 ‘제2의 사춘기’였던 것 같다(웃음). 그래서 사회생활 하기 힘든 적도 몇 번 있었던 것 같고(웃음). 그런 질문들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고수를 어떤 단어나 이미지로 규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난 틀에 갇히는 게 싫다. 무언가로 규정되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는 느낌이 든다. 어느 한쪽에 갇히기보다 그 사이에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그 사이에.” 그는 ‘틀에 갇히지 않는 남자’라는 수식어조차 거부했다. “그렇게 말하니까 갑자기 틀에 확 갇히는 듯한 느낌이다. 하하하하.” 제목을 달 수 없는, ‘무제’ 같은 배우 같으니라고. 그래서 그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연기에는 ‘정답’이라는 게 없으니까.” 그의 설명이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익숙하고, 능숙하고, 편안해지는 것이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카메라 앞에 선 경험을 통해 기술적인 노하우를 쌓을 수는 있다. 하지만 새로운 작품과 새로운 캐릭터를 맡을 때마다 이전까지의 연기, 그 기억들을 ‘0’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그가 추구하는 연기에 대한 실마리를 얻어 보는 건 어떨까. 그는 최근 본 가장 인상적인 연기로, 현대 미국 서부 사회의 현실을 그린 ‘로스트 인 더스트’(2016, 데이비드 맥켄지 감독)의 한 장면을 꼽았다. 하워드 형제의 은행 강도 사건을 수사하는 해밀턴(제프 브리지스) 형사가 어느 외딴 동네에 들러 마을 사람들에게 하워드 형제에 대해 묻는다. “그 식당에서 해밀턴에게 그 모든 것이 별일 아니라는 듯 툭툭 말을 던지는 동네 할아버지들의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고 고수가 답한다. 그가 말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연기”란 그런 것이다.

그에게서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겠다’는 식의 약속 같은 걸 바라는 건 무리한 욕심이다. “난 진짜 약속 같은 거 못하는 사람이다. 날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약속을 하면 거기에 나 자신을 맞춰야 하지 않나. 그에 대한 부담이 확 몰려오면서 ‘내가 약속을 못 지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평소에 사람들을 잘 못 만난다(웃음). 내가 자꾸 갑자기 연락하니까.” 번지르르한 약속을 하는 대신 솔직해지길 택한 사람, 그런 배우. 어떤 약속 없이도 우리가 고수의 연기를 기대하는 건 그 때문 아닐까.


장성란 기자 hairpin@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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