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JP의 후보추대 격론|"JP출마 땐 반대 데모진압 명분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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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80년 서울의 봄은 최규하 정부가 이끌었다. 권력 기반이 없었는데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통령보궐선거에 단일후보로 추대됐다. 그렇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김종필씨는 권력의 자리에서 멀어져 있기는 했어도 박정일 대통령의 잠재적 승계자 자리에서 밀린 일이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권력을 승계 해 과도정부를 이끄는 자리로 나아가는 길에선 최 대행에게 밀렸다.
안개 속에서 출범한 최규하 정부는 야당과 국민의 민주화요구를 재빨리 수용하는 것이 우려되는 정치혼란을 방지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박대통령이 사라진 권력의 진공상태에서 유신체제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부나 여당 간부 모두의 한결같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개헌을 서두르지 않았다. 유신헌법은 철폐하지만 개헌을 하고 새 대통령을 선출하는 과도기간을 1년 반 정도로 잡았다.
그리고 과도기간을 이끌 대통령도 최 대행이 맡도록 의견을 모았다. 이 같은 결정은 박대통령의 국장기간 막후협의에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어느 회의체가 이를 결정했는지 에는 기억들이 엇갈린다. 당시의 각료들은 시국대책회의에서 결정했다고 기억한다.

<최 대행 단일후보로>
시국대책회의는 10·26다음날부터 국정을 이끌 중심기구로 운영되었다. 이 회의의 멤버는 최규하 대통령 대행·신현확 부총리·박동진 외무·패자춘 내무·김치열 법무·노재현 국방·김성진 문공·김종환 합참의장· 정승화 계엄사령관이다. 이 대책회의에 국방장관과 함께 두 현역장성이 포함되어 있다. 비상계엄 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때 정부가 군에 상당히 의지하고 있었음을 읽을 수 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시국대책회의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시국대책회의에 계엄사령관을 멤버로 했읍니다만 노국방이 참석해군을 대표하는 발언을 하니까 저는 따로 할말이 없었어요. 계엄업무도 바쁘고 해서 대책회의에 꼭 나가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11월초인가 노국방 승용차를 함께 타고 대책회의에 나가면서 국방장관이 참석하는데 계엄사령관이 꼭 나가야할 필요가 있겠읍니까. 특별히 일이 있을 때만 나가겠다고 했읍니다. 노국방도 그러라고 해서 그 날 회의에서 제가 최 대행에게 그 말을 했더니 깜짝 놀라고 당황해 하시는 것 같더군요.
그래 제가 딴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하다고 부르시면 언제든지 참석 하겠습니다고 했지요. 그런데 회의 때마다 거의 빼놓지 않고 나오라고 해서 결국 계속 참석했읍니다.』
정총장의 말 그대로 정부는 계엄군을 중요시했고 대책회의가 모든 일을 결정했다. 김치열 법무장관은 개헌과 과도기간 등 문제도 시국대책회의에서 결정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승화계엄사령관은 이 문제는 국무회의에서 결정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유신헌법을 개정하기로 했다는 정부방침은 노국방한테서 들었어요. 노국방은 새 헌법을 만들어 대통령을 선출하는데는 2년 정도는 잡아야하니까 일단 현행헌법에 의한 보궐선거를 한 다음 새 대통령의 책임 하에 개헌을 하자는 쪽으로 국무회의에서 의견이 모아졌다고 해요. 그러면서 새 대통령으로는 최 대행을 추대하기로 했다면서 내 의견을 물어요. 나는 최 대행의 대통령추대는 찬성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과도기간 2년은 너무 길다.1년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을 제시했더니 노장관은 길게 잡아 2년 이내 라더군요. 제가 나서서 정부의 그 같은 방침을 군인들에게 납득시키겠다고 말하고 군단장 이상의 지휘관들을 육군회관으로 초청, 이 방침을 전해주었읍니다.』
그러나 이 방침을 발표한 것은 박대통령의 국장이 끝나고도 근1주일이 지난 11월10일이다. 최 대행은 이 날 발표된 시국수습 담화에서 유신헌법이 규정한 시일 안에 대통령 보궐선거를 실시해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에게 정부를 이양하겠다면서 그러나 새 대통령은 잔여임기를 채우지 않고 개헌을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 날 정부이양이라는 말을 썼지만 이미 이때는 내부적으로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을 최 대행으로 내정하고 있었다. 발표가 늦어진 것은 바로 이 같은 방침을 정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실시할 대통령 보궐선거의 후보문제는 처음 얼마 동안은 방향을 잡지 못했다. 최 대행은 처음 얼마 동안은 대통령 대행으로서 임무를 끝내겠다고 했다. 국장이 준비되고 있던 때 최 대행은 전국회의장 이효상씨를 비롯한 여당원로들에게 이런 뜻을 말했다. 물론 이때는 보궐선거 실시문제가 확정되지 않았던 때지만….
그런데 막상 대통령 보궐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되자 후보는 최 대행 쪽으로 쏠렸다. 최 대행은 주저했다. 최 대행이 나서지 않는다면 선택은 김종필씨뿐이었다. 그러나 내각도 계엄당국도 김종필씨가 과도정부를 이끄는데는 반대였다.

<박대통령 친위대앞장>
그 무렵 정부도 공화당도 모두 박대통령의 친위세력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그들의 정치성향을 굳이 구분한다면 반 김종필 계열이던 백남억씨 등 4인 체제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그때 국정의 중심부였던 시국대책회의 멤버만 해도 신부총리·패내무·김법무·여국방·김문공 등이 그렇다. 당장 임고문인 정일권·백남억·이효상씨, 당의장 박준규·유정회의장 백두진씨 등도 모두 김종필씨와는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립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JP등장을 반대할 명분도 나름으로는 갖고 있었다.
과도기를 넘어가기 위해서는 정치기반이 있는 실력자를 필요로 했다. 그 점에선 JP가 적격이긴 했다. 그러나 JP는 개헌을 한 뒤 정권경쟁에 나설 것이라는 인식 때문에 야당과 국민의 반대에 마주칠 가능성이 있었다. 이들은 이점을 내세웠다. 그렇다고 이들이 최 대행 지지파는 아니었다. 최 대행은 정치적 야망이 없다. 바로 그 점이 안개정국의 상황에서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쉽게 대통령추대에 합의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노국방도 바로 그런 점을 지적했다. 김종필씨가 보궐선거에 출마할 경우 반대데모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럴 때 계엄군이 그 진압에 나설 명분이 없다는 얘기였다.
이런 합의는 시국대책회의 각료 선에서 맨 먼저 의견이 모아졌다. 그런 뒤 이효상·백남억씨 등 당고문, 그리고 박준규 공화당 의장 등과 협의해 합의했다.
이들은 JP에게 통대 보궐선거에는 나서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공화당총재로 추대하기로 했다.
이 제안은 백남억 구상으로 알려졌다. 이런 합의를 한 뒤 JP쪽에 이 구상을 전했다. 김종필씨도 이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패자춘 내무는 정부쪽에서도 그런 구상을 했지만 정부쪽이 JP폭에 제안하기 전에 JP가 먼저 말해봤다고 회고했다.
『당시 JP는 박 대통령 외에는 유신헌법을 이끌고 갈 사람은 없다고 믿었다. 박대통령의 잔여임기가4년여 남았지만 누구도 그 임기를 채울 수가 없으며 헌법개정은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JP는 유신헌법에 따른 과도기적 대통령자리는 최 대행에게 넘기고 새 헌법에 따라 국민의 심판을 받기로 작정하고 이런 의사를 최 대행에게 전했고 그 때문에 주저하던 최 대행이 격심을 할 수 있었다』고 패내무는 말했다.
막후에서 이루어진 이 같은 구상은 공화당의 총재 결정 과정에서 다소의 혼선은 있었지만 그대로 현실화되었다.
공화당은 11월4일 대통령의 국장을 치르고도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숫제 회의조차 열지 않았다. 총재가 가버린 뒤 당을 이끌 책임자는 당헌상으로는 박준규 당의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당을 이끌어갈 정치기반이 없었다. 당무회의든 의원총회든 열어야 하는데 회의를 열면 당의 정비문제가 나올 것은 뻔했다. 정비란 말할 것도 없이 당총재추대문제가 되는데 대세는 김종필로 기울고 있었다. 결국 박당의장은 시간을 끌었다. 이 사이 오치성· 김택수·장영정·길전직·김창근·장경정·김종철·김유탁·김임식 의원 등이 JP총재추대운동을 벌였다.
다른 한쪽에선 JP의 당총재 추대라는 대세에 따르되 통대의 보궐선거에 당총재는 참여치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이 양해가 성립되어서야 비로소 회의가 열렀다.
최 대행이 보궐선거 실시를 발표한 그 날 공화당도 당무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선 총재는 전당대회에서 선출한다는 당헌을 「총재가 궐위중으로 전당대회를 소집하기 곤란할 때는 당무회의에서 총재를 선출할 수 있다」로 고치기로 했다. 그런 뒤 정일권 고문이 JP의 총재추대를 제의했고 모두 찬성했다.
그러나 당헌 수정 등이 있었기 때문에 l2일 의원총회를 거친 뒤 하오에 당무회의를 열어 JP총재추대를 확정키로 했다. 물론 당헌수정과 JP의 총재추대는 통대 보궐선거불출마의 약속을 배경에 깔고있었다.
11월12일 열린 공화당 의원총회는 총재를 당무회의에서 선출할 수 있도록 한 당무회의 당헌수정안을 추인했다. 이것은 김종필의 총재추대를 의미했다. 이 자리에서 박준규 당의장은 막후의 양해사항을 의원총회결의로 기정사실화 하려했다.
그는 앞으로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선출할 대통령은 개헌을 추진하고 이에 따른 선거를 관리할 과도내각이 될 것이므로 이번 총재는 통대 보선에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자고 했다. 의원들은 감작스레 나온 이 말의 진의를 잘 몰라 어리둥절한 채 였고 박의장은 『이의 없소? 그러면 이것이 결의된 것으로…』라며 사회봉을 들려고 할 때 남재북화원이『이의있소』라고 손을 들었다. 남의원은 총재를 뽑으면서 통대의 대통령보궐선거 불출마조건을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조건 없이 추대하자고 했고 의원들이 모두 남의원 제안에 박수를 보냈다.

<의총선 jp출마 결의>
이어 열린 당무회의는 JP총재추대를 확정했다. 줄곧 JP의 반대편에 있었던 이효상 고문도 『이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국가와 민족을 구할 사람은 JP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 날 당무회의는 의원총회분위기에 묶여 새 총재의 통대 불출마를 결의하지 못했다.
공화당은 사흘 뒤인 11월15일 통대 보궐선거문제를 논악했다. 김총재 측근들은 김총재가 일단 권력을 이어 받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들 나름으로는 흐름을 그 방향으로 이끌기로 했다. 우선 문제 제기는 그들 JP직계보다는 사흘 전 의원총회에서 불출마 조건을 반대해 제동을 건 남재희 의원에게 김총재를 통대 보선의 후보로 추대해주도록 부탁했다.
남의원은 의원총회에서 통대의 대통령보궐선거에 공화당이 후보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대통령의 유업을 계승키 위해 김종필 총재의 후보추대가 불가피하다면서 JP가 대통령을 맡아야할 이유들을 나열하고 『의원총회는 김총재를 후보로 추대하자. 수락 여부는 김총재의 현명에 맡기자』 라고 했다.
이번엔 사임한 박준규 의장 대신전국회의장 이효상 고문이 반대하는 입장을 대표해 발언했다. 그는 보궐선거에서 당선될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개정하고 선거를 관리함 과도정부를 이끌 수밖에 없다는 상황을 길게 설명한 뒤 『김총재가 통대의 보궐선거에 나가 대통령이 된다면 진짜 대통령을 뽑을 때는 못나가지 않느냐….일이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고문과 같은 생각은 소수였다. 여명의 의원들이 발언을 얻어 김총재 출마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권력이란 하루만 남의 손에 넘어가도 원심분리작용을 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되면 대권획득의 기회도 점차 멀어져간다』 『공화당의원들이 각자 자기 선거구출신 통대 대의원들을 포섭하면 김총재의 당선은 문제없다』 그런 얘기들의 연속이었다.
박찬종의원이 『지금 우리는 야당을 준비할 때』라는 말로 JP추대론에 대한 반론을 폈으나 「정치는 현실이야」 「집어쳐」 라는 야유들에 밀렸다.
조용히 토론 내용을 듣고만 있던 김총재가 예의 안개론을 편 것은 이때다.
『여러 의원들의 국가를 위한 진지한 토론에 눈물겨울 뿐이다.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통령 직선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여러 의원들이 본인을 대통령후보에 추대하려는 충정은 알고 있다. 그러나 현 정치상황은 이제 겨우 자동차의 와이퍼가 서서히 움직이는 안개정국과 같다. 희미하게 앞이 보이는 찰나인데 무리하면 피를 흘리게 된다. 따라서 본인이대통령 보궐선거에 안 나가려는 것만은 양해해야 한다.』
김총재의 이 같은 발언에 의총은 또 한번 떠들썩 해졌다. 의원총회 결의를 총재가 묵살해서는 안된다는 아우성이었다.
하오5시에 시작된 의원총회는 통대보선의 JP출마를 결의하고 그 날밤 자정 무렴에야 끝났다. 그만큼 토론은 격렬했다.
곧 바로 당무위원·상임고문연석회의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도 출마와 불출마가 갈렸지만 역시 출마해야 한다는 쪽이 다수였다.

<출마반대 3가지 이유>
『의원총회와 당무회의가 대통령 보궐선거의 우리 당 후보 옹립을 만강일치로 결의했고 많은 당원들의 뜻이 그러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본인은 이번 대통령 보궐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본인은 당원들의 열화 같은 요망에 부응하지 못한 것을 못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그의 불출마 결단을 아쉬워하는 의원들은 『그가 순수했다』 『권력 싸움에서 숱한 피해를 봤으면서도 그 속성을 알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그러나 이 말은 맞지 않다.
물론 그때 JP 스스로는 보선에 나가야 하느냐에 스스로도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어느 면에서는 나가지 않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 아니라 나갈 수 없었던 현실에 승복했다고 할 수 있다. 나갈 수 없었던 현실이란 그의 출마를 반대한 소수파가 제시한 3가지 이유다. 그 3가지는 ①민주화를 거스를 명분이 약하다.②최규하 권한대행의 내각이 과도내각 역할을 할 수 있다.③과도기를 조용하게 넘기는 것이 군부의 희망이다 라는 것.
그때 김종필씨의 총재 추대엔 앞장섰으면서도 보선출마 문제에선 반대편에 섰던 이가 김창근 의원이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말했다.
『지나고 보면 그때 그랬어야 하는 건데…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렇지만 그때 사정에선 JP의 보선출마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 당시 정부와 군을 이끌고 있던 사람들은 박대통령의 친위세력으로 JP와는 거리를 갖고 있었다. 더러는 JP를 견제하는데 역할을 했던 일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당이나 의원들 입장에선 JP가 갖고 있는 대중기반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부나 군에선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김종필씨가 과도정부를 맡으려 할 때 따라 올 리가 없었다. 또 하나 당시는 개헌후의 새로운 선거는 페어플레이를 해야한다는 묵시적 합의가 사회전반의 분위기였다.JP가 과도정부를 맡고 집권자라는 프리미엄을 갖고 개헌후의 선거에 나서려할 때 야당이나 국민의 반대도 예상되었다. 자칫 양면의 공격을 초래할 위험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JP가 무리를 감행한다면 그 때 바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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