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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폭의 원점] "日에 책임있다" 외치는 일본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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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003년 6월 19일. 나가사키(長崎)지방법원 법정은 환호성에 휩싸였습니다. 히로세 마사히토(廣瀨方人)씨의 승소. 일본 국외에 거주하는 피폭자에게도 원폭의료법을 시효 없이 적용한다는 판결이었습니다.

나가사키 대학의 다카자네 야스노리(高實康稔)교수와 함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나는 착잡했습니다. 일본에서는 한국인 피폭자가 일본을 상대로 낸 몇 가지 의미 있는 재판이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한국인 피폭자에게도 건강관리 수당을 지급하라는 이강녕(李康寧)씨 재판은, 고법에서까지 승소합니다. 그러나 원호법(원폭의료법)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는 때를 기준으로 5년을 소급해서 보상하되 그 이상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곽귀훈(郭貴勳)씨 판결에 분개한 히로세씨는 한국의 피폭자를 지원하기 위해 일본을 제소하고 나섭니다.

히로세씨는 말합니다. "우리들 일본인도 원호법이 제정될 때까지 12년간이나 방치돼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 피폭자들은 58년이나 버려져 있지 않은가."

나가사키로 떠나오기 전날, 장맛비가 잠시 그친 서울의 하늘은 잿빛이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가 있는 날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이 아닙니다. 옥색 무늬가 아롱대는 희디흰 손수건 같은 가슴을 가진 꽃다운 나이의 소녀였습니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갈기갈기 찢어진 채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어 전선을 떠돌아야 했던 우리들의 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고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무심하게 지나갔지만 그들의 분노는 치유도 보상도 되지 않은 채, 무참히 짓밟힌 상처는 아물지 않고 저 긴 세월을 함께하며 피를 흘리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끝내 강제징용에 대해서는 국가책임을 회피한 채 피폭자들에 대한 원호가 58년이라는 세월이 지나서야 겨우 이루어지려는 것입니다. 어느새 일본의 피폭자 평균 연령도 71.59세입니다.

58년이 지나서도 전쟁과 핵 폭탄이 피해자들의 영혼과 육체에 미친 상처가 이렇게도 선연한데, 다른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파병, 그리고 핵 개발이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미국은 걸프전 이후 소규모의 핵 폭탄을 계속 사용해 왔고, 일본은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으며, 북한의 핵 개발은 한반도를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는 지금입니다.

그러나 희망의 싹은 어디에서나 자라고 있습니다. 그 희망을 찾아 나는 계단을 올랐습니다.

'오카 마사하루(岡正治)기념 평화자료관'. 나가사키 역 건너편 언덕에 문을 연 이곳은 놀랍게도 '일본의 전쟁 책임과 가해 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전후 보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설립된 곳입니다. 어떻게 이런 자료관이 4층 건물로 우뚝 서 있을 수 있을까. 다카자네 교수(자료관 이사장)의 설명은 이렇습니다.

"평화운동가 오카 마사하루 선생이 돌아가신 후 어떻게든 그 유지를 이어가야 한다는 뜻에서 시민들이 힘을 모았습니다. 이 자료관은 첫째 순수한 시민의 힘만으로 설립.운영되며, 둘째 일본의 가해 책임과 보상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전시되고, 셋째 '배우고''모이고''행동하는' 장소입니다."

원폭 문제에서 침략 전쟁까지를 가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귀중한 자료들이 전시장에는 가득차 있었습니다. 심지어 작두로 사람의 목을 잘라 여기저기 머리가 나뒹구는 만행의 현장 사진을 보며 저도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이 자료관은 올해 5월 26일 특정비영리활동법인(NPO) 인가를 받았습니다. '사설(私設)'의 불안을 털고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일본 '우익'들의 습격이 있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다행히 개관 8년을 맞는 지금까지 사고는 일절 없었다고 합니다.

나가사키 일원에 거의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군국주의 일본과 강제징용, 거기 이어지는 피폭의 현장이 있었습니다. 저의 소설 '까마귀'의 마지막 무대가 되는 피폭지 스미요시(住吉) 지하 공장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예전 취재차 이곳에 들렀을 때 공사장 앞은 벽돌공장이었는데,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해 차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소설 속에서 '우석'과 '이팔'이 터널 폭파에 실패하고 폭약을 들고 대치하던 바로 그 자리에 저는 땀을 훔치며 서 있었습니다.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굴 속을 1백여m 걸어 들어가 보며, 이곳에서 피땀을 흘리던 분들의 고통에 가슴이 메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거기서 들고 온 조그마한 돌 하나를 저는 '까마귀'를 쓰는 동안 내내 책상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그으면 살이 베어질 것처럼 날카로운 돌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땅굴은 아예 입구를 콘크리트로 막아 버렸거나 굵은 쇠창살로 문을 해 닫고 있습니다. 이곳 또한 과거사 은폐의 현장입니다. 이곳은 바로 인권 시민단체들이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을 데리고 와, 침략전쟁의 실상을 알려주던 역사 교육장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원폭 투하 중심지에서는 그날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규탄하는 시민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일본의 양심이었습니다.

우리 세대가 피해의 역사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일본도 가해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가사키는 '평화의 발신지'만으로도 인류의 보고가 될 수 있습니다.

피폭이라는 그 비극의 원점에서 나가사키여, 평화의 원점으로 피어올라라, 그들에게 소리치고 싶었습니다. '평화자료관'의 관람자가 남긴 한마디가 떠올랐습니다.

"약자의 입장에 설 것인가, 권력자의 입장에 설 것인가. 그 위치에 따라 사회나 역사,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그 사람의 '그때부터'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수산 <작가.세종대 교수>

사진=이시타 겐지(石田謙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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