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하는 「욕구충족」큰 부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한 가정의 살림살이에는 그 가정의 생활상이 낱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최근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민주화 과정에서의 각계 각층의 욕구 분츨, 선거 등 정치일정, 지자체 시대의 개막,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우리 경제의 현실적인 부담능력까지가 내년도 나라예산에는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내년 예산을 짜면서 앞세워진 것을 순서대로 보면 저소득층 지원, 소득불균형 완화, 국민생활의 질적 향상, 산업체 질 강화, 지방화 시대의 뒷받침, 올림픽 준비, 외교·안보 역량의 강화 등이다.
이 같은 우선 순위는 지난 60,7O년대에 비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올해 예산편성 상의 중점순위인 농어촌지원, 국민복지 향상, 개방에 대비한 산업경쟁력 강화, 올림픽 지원, 사회 안정 등과 견주어 보아도 「욕구충족」적인 비목들이 훨씬 구체적으로 개념화되어 앞세워져 있음이 눈에 띈다.
나랏돈 씀씀이의 이 같은 방향전환은 기왕에 6차 5개년 계획을 짤 때부터 이미 천명되었던 것이긴 하다. 그러나 6차 5개년 계획상에 국민 복지증진·지역간 균형개발·농어촌 종합개발 등의 기본 방향이 설정되었다는 것과, 그 실천을 위한 대부분의 제도 도입이 정부이양이 있는 88년을 기점으로 일제히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
바로 이같이 「예정된」씀씀이들이 내년도 나라살림에 엄청난 압박을 주게 됐다.
실례로 내년도 예산 중 이것저것 다 긁어모아 농어촌 지원이라는 비목아래 들어가는 돈은 6천7백억 원(87년에는 5천2백억 원), 국민 연금제·의료보험·영세민 지원 등 이른바 국민복지를 위한 비용은 5천3백억 원(87년 3천7백억 원), 지방자치단체에 넘겨주는 나라 예산이 1천8백억 원(87년 없음)등이 된다.
위의 3가지 비목만 해도 약 1조3천8백억 원으로 옴쭉달싹 못 하고 매년 써야하는 경직성 경비를 제외한 일반 사업비 5조2천억 원의 27%가 된다.
이 같은 지출 소요가 정부 이양이 이뤄지는 88년을 겨냥한 것이든, 경제발전 단계상 논리 정연하게 계획된 것이든 현실적인 살림살이에 큰짐이 되었다.
지금까지와 같은 예산편성 기법으로는 도저히 「균형예산」이 짜여지지가 않게 된 것이다.
예산당국의 그 같은 고민을 해결해준 기발한 묘안이 바로 내년도 예산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재정투융자특별회계」라는 자못 복잡한 이름의 「제2예산」이다.
간단히 말해 지금까지 일반 예산에서 충당하던 각 정부투자기관에 대한 출자와 각종 기금에 보태주는 출연을 내년부터는 일반 예산에서 떼어내 별도의 회계장부로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출자나 출연에 필요한 자금은「세금」이 아닌 정부투자기관 민영화에 따른 「주식매각대금」에서 충당한다는 계획이다.
이 같은 새 기법 도입으로 지출소요는 그처럼 크게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해야 할 조세부담률은 올해의 17.9%에 비해 내년에 18%로 거의 제자리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출 쪽에서 보면 출자나 출연은 그리 쉽게 회수될 돈들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면 결국 「재정투융자특별회계」는 예산팽창을 호도하는 편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들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매년 예산편성 때마다 「조용한 진통」을 겪는 일이지만 방위비 책정을 꼭 GNP의 몇 %라는 식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사고방식을 지양, 이제는 복지수요와 관련, 재고해야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하반기 이후에 터진 노사분규와 관련, 앞으로의 산업 구조조정·실업대책 등을 위한 재정 배분을 예산편성 막판에 가미하는 「기민성」이 모자랐음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