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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계경후든 경쟁자 제거든 암살자 의도 빗나갈 때 많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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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22면

[세상을 바꾼 전략] 암살의 정치학

지난 13일 북한 최고 권력자 가계의 일원인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암살됐다. 인간 역사에서 암살은 전쟁만큼이나 자주 등장한다. ‘암살 목록’이라는 위키피디아 주제어 설명에 포함된 암살 사건만 해도 무려 수천 건에 이른다. 극단적인 인간 행동인 암살은 그만큼 보편적인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1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계기가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암살 장면을 묘사한 아킬레벨트람의 그림. 이탈리아 주간지 ‘도메니카 델 코리에레? 1914년 7월 12일자 1면.

1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의 계기가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의 암살 장면을 묘사한 아킬레벨트람의 그림. 이탈리아 주간지 ‘도메니카 델 코리에레? 1914년 7월 12일자 1면.

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치하던 독일 보안본부장 하이드리히에게 총격을 가하는 모습. 테렌스 쿠네오의 1942년 그림. [위키피디아]

2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치하던 독일 보안본부장 하이드리히에게 총격을 가하는 모습. 테렌스 쿠네오의 1942년 그림. [위키피디아]

암살 행위는 어떻게 규정되고 있고 또 어떤 효과를 낼까? 먼저, 암살이라는 용어의 뜻부터 살펴보자. 암살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몰래 죽인다’는 것이다. ‘몰래 죽인다’는 의미는 죽는 순간이 남에게 관찰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암살은 백주 대로에서 자행될 때가 많다. 왜냐하면 암살 대상은 백주 대로에 있을 때 접근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김정남 암살 사건도 지나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공항에서 벌어졌다.

피살자가 순교자로 받아들여져 #원래 의도와 정반대 결과 낳아 #사라예보 황태자 부부 암살도 #세르비아 독립 아닌 1차대전 불러 #과잉충성에 의한 아키노 암살로 #마르코스 정권 종말의 길 들어서

또 ‘몰래 죽인다’는 말은 암살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암살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assassination’은 8~14세기 이란 북부 지역에서 비밀조직으로 운영된 이슬람 니자르 시아파의 한 분파인 아사신의 교도들이 하시시(대마초)를 복용한 환각 상태에서 주요 인물을 살해한 후 도주하지도 않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한 용어다. 실제 여러 암살 사건에서 암살자가 스스로 나서서 자신이 저지른 행위라고 밝히기도 했다.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동기 필수

대부분 문헌은 제도적인 절차에 의한 적법한 사형이나 국가 간 전쟁 대신에, 미리 준비한 비밀 계획에 따라 살인을 모의하는 행위를 암살로 본다. 『손자병법』 제13장 용간편에서도 암살이 성공하려면 간첩 활동이 잘 돼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만큼 암살은 준비가 잘 돼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치밀한 사전 계획이 있어야만 암살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암살 사건으로 불리는, 특히 실패한 사례 가운데 다수는 증오하는 인물을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즉흥적으로 죽이려 한 것이라는 집계가 있다. 더구나 현대 암살 사건의 주모자 가운데에는 정신질환자가 적지 않다.

3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한 후 공화정 만세를 외치고 있는 모습. 사건 후 암살자의 의도와 달리 로마 공화정은 황제정으로 바뀌었다. 장 레온 제롬의 1867년 그림.

3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카이사르를 암살한 후 공화정 만세를 외치고 있는 모습. 사건 후 암살자의 의도와 달리 로마 공화정은 황제정으로 바뀌었다. 장 레온 제롬의 1867년 그림.

암살인지 아닌지를 구분할 때 더 중요한 기준은 암살 대상이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자행되는 테러나 청부살인을 암살로 부르지는 않는다. 영향력이 있는 인물을 대상으로 해서 암살 가담자 말고는 그 누구도 미리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자행되는 살인 행위만이 암살로 불린다.

암살은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동기를 필수 요건으로 보기도 한다. 살인 행위에 신념이 수반되지 않으면 청부살인으로 부른다. 청부살인의 가장 흔한 동기는 단순히 돈이다. 실제로 청부살인 사건에서 가장 빈번한 범행 동기는 보험금 수령으로 집계되고 있다.

사람들이 주목하는 암살은 주로 최고 권력자를 대상으로 행한 것들이다. 권력이 집중될수록 최고 지도자 암살의 효과는 크다. 최고 권력의 갑작스러운 공백으로 체제가 흔들려 적대국은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불안정이 적대국을 대상으로 도발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에 적대국이라고 해서 경쟁국의 불안정을 무조건 반길 일은 아니다. 독재자가 암살되더라도 체제 변화 없이 독재자만 바뀔 뿐 지배연합 자체는 별로 바뀌지 않기도 한다.

권력이 분산된 민주 체제에서는 최고 지도자가 암살되더라도 권력 지분 자체가 변화할 여지는 크지 않다. 최고 지도자 암살로 기대되는 변화의 폭이 작다고 해서, 최고 지도자가 암살되는 사건이 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 체제에서는 암살 효과가 독재 체제보다 작다고 하더라도 암살 대비책이 느슨하기 때문에 암살 빈도가 낮지 않다. 민주 체제인 미국에서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는 수십 차례로 집계되고 있고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가필드, 윌리엄 맥킨리, 존 케네디 등 암살된 현직 대통령만 해도 4명에 이른다.

암살 주모자는 집단 내부에서 나올 수도 있고 집단 외부자일 수도 있다. 먼저, 외부자가 모의하는 암살은 여러 병법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종의 전략이다. 상대 세력 전체를 무너뜨리기에는 역부족할 때 승리를 얻으려면 상대의 우두머리를 꺾어 도모할 수밖에 없다. 하천을 따라 내려가던 통나무들이 서로 얽혀 막혀 있을 때 킹핀으로 불리는 특정 통나무를 제거하면 얽힘이 풀려 잘 흘러간다. 상대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킹핀을 제거하려는 목적에서 암살이 활용되기도 한다.

적대세력 지도자 암살은 표적사살

정부가 적대 세력의 지도자를 암살해 적대 세력에 타격을 가하려 하는 것은 표적사살로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영국 정부와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의 이른바 ‘유인원작전’이 그런 예이다. 유인원작전은 1942년 보헤미아-모라바 지역을 통치하던 독일제국 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암살하려는 작전이었다. 하이드리히는 프라하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던 중에 암살단의 폭탄 투척을 받고 1주일 후 죽었다. 나치는 체코슬로바키아 마을 하나를 통째로 소각하고 수많은 체코슬로바키아인을 죽이는 등 대대적인 보복을 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단기적으로 암살 후폭풍을 겪었지만, 1945년 독일 패전 후에는 하이드리히 암살 사건이라는 성과 때문에 국경선 획정 협상에서 발언권을 얻기도 하였다. 강력한 상대 집단의 지도자급 인물을 암살하는 행위는 열세에 있는 자기 집단의 존재감을 고양시켜 후일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상대 지도자를 암살하는 표적사살은 주로 테러 집단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다. 표적사살이 국제법을 위반한다는 일부 주장이 있지만, 테러리스트와 범죄자에 대한 표적사살은 방어적 선제공격으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다음, 내부자가 모의하는 암살이다. 아무리 최고 권력자라고 하더라도 측근이나 몰래 잠입한 자객에 의해 암살될 가능성은 늘 있다. 암살 대상자의 권력이 크면 클수록 그를 암살하는 데 성공하면 돌아올 전리품이 그만큼 더 크기 때문이다. 물론 실패했을 때 져야 할 대가도 전리품 이상으로 크다.

암살 도구의 발달에 따라 암살에 대응하는 방법 역시 진화를 거듭하여 왔다. 일본의 창검 시대에는 누군가가 걸으면 소리를 내어 자객의 침입을 알리는 우구이스바리(나이팅게일 마루)가 암살방지용 시설의 예이다. 총포 시대에는 각종 방탄 시설, 오늘날은 각종 첨단 기술의 탐지 시설 등이 암살 도구 발전에 대응하여 진전되어 왔다. 그러나 그런 암살방지용 시설로 모든 암살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제19장에서 권력자가 증오나 경멸을 회피하여 백성들을 만족시킨다면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이 책은 모반의 음모에 대처하는 가장 강력한 방안은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백성들이 권력자의 사망에 슬퍼하게 된다면 음모자는 음모를 실행에 옮기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자 또는 우월적 힘을 가진 측이 자행하는 암살도 적지 않다. 권력자가 암살을 꾀하는 경우는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거나 경쟁 상대에게 갈 자원을 없애버리는 의도에서이다. 아니면 원숭이가 보는 앞에서 닭을 죽여 원숭이에게 겁을 준다는 이른바 살계경후(殺鷄儆?)의 의도에서 행하기도 한다. 1392년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한 행위는 그렇게 기획되었다. 정몽주의 목을 높은 곳에 매달았고 저항하던 나머지 세력의 기를 꺾었던 것이다.

4 암살된 아키노 전 의원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암살을 자행한 마르코스 정권은 의도와 달리 붕괴의 길로 접어들었다. [위키피디아]

4 암살된 아키노 전 의원의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 암살을 자행한 마르코스 정권은 의도와 달리 붕괴의 길로 접어들었다. [위키피디아]

이방원, 정몽주 죽여 반대세력 기 꺾어

살계경후가 성공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특히 측근의 과잉 충성에 의한 암살은 권력자를 망치기도 한다. 1983년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정권이 베니그노 아키노 2세를 암살한 행위는 정권을 종말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암살은 비겁한 행위임에 분명하다. 기원전 44년 로마 원로원 의원은 한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이 무방비의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추악한 난도질로 암살했다. 공화정을 유지하려고 카이사르를 암살했지만, 결과적으론 오히려 공화정을 종식시켰고 왕정보다 훨씬 권력이 집중된 황제정을 가져오고 말았다. 암살은 암살자가 의도한 결과를 잘 가져다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피살자가 순교자로 받아들여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암살은 독재자도 순교자로 만들기도 한다.

세상을 바꾼 것으로 언급되고 있는 대표적인 암살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를 저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1차 세계대전은 발생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암살이 적어도 전쟁의 도화선이었음은 분명하다. 암살자의 의도는 세계대전이 아니라 세르비아 독립이었을 것이다. 세상을 바꾸긴 했지만 암살자의 의도대로 전개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암살 효과라고 하면 암살자가 바라는 결과가 실현된다기보다, 죽일 정도로 증오하는 대상을 처단하는 한풀이 굿에 불과할 때가 많다.

김정남 암살단의 전모와 의도가 아직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 그 의도가 살계경후, 망명 저지, 자금 획득, 경쟁자 제거, 국면전환 등 무엇이든 김정남 암살 이후의 상황은 암살자의 의도대로 진행될 것 같지 않다.

김재한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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