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양가 상승 뒤엔 재건축 조합 비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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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앓는 도심 정비사업

지은 지 20년이 훨씬 넘은 낡은 아파트를 허물고 새로 짓는 재건축 사업을 추진 중인 서울 강남권 A조합. 조합 집행부가 지난 2년간 10여 건의 외부 용역계약을 임의로 체결했다. 총회를 열고 주민 동의를 받아 추진해야 하는 절차를 무시하고 모두 38억원을 직접 계약했다.

강남 4구 8개 조합 점검
부적정 사례 124건 적발
자금사용 관련이 70%

조합장이 용역계약 등 좌우
늘어난 사업비 분양가에 포함
지자체 감시?감독 강화해야

B 재건축 조합은 세무회계 용역계약 때 수수료가 과다하게 나오도록 수수료 산정 방법을 통상적인 경우와 다르게 책정했다. 비용이 더 들어가면서 조합원들의 부담은 늘어났다. C 재건축 조합은 아파트 설계 용역계약 후 14년이 지난 시점에 뒤늦게 소급해 용역비를 올렸다. 이미 지급한 용역비에도 인상된 요금이 책정돼 추가로 용역비를 내야 했다.

대표적인 아파트 재건축 조합의 잘못 또는 비리다.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한 국토교통부와 서울시는 16일 해당 조합에 조합장을 교체하라고 권고했다. 국토부 관계자는 “현행 법령에 따른 첫 조합장 교체 권고”라며 “강제사항은 아니지만 조합장을 바꾸지 않으면 자치단체의 견제 등으로 사업 진행이 순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재건축·재개발 사업이 바람 잘 날이 없다. 재건축뿐 아니라 재개발 등을 포함하는 도심 정비사업을 둘러싼 혼탁이 끊이지 않는다. 2014년 이후 주택시장 회복세를 타고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비리의 유혹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최근에 서울 송파구 가락동 가락시영아파트의 조합장이 구속됐다. 잠실5단지 조합의 경우 전 조합장 두 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도심의 주요한 주택 공급원인 정비사업이 얼룩지면 주택시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조합 간부가 돈을 빼먹거나, 조합이 행정 절차를 잘 안 지켜 비용을 더 쓰면 사업비가 늘어난다. 조합은 그 비용을 만회하려 분양가를 높이게 된다. 분양가가 오르면 주변 아파트 가격에도 영향을 미쳐 주택시장이 불안해진다. 조합 비리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강하게 나오는 이유다.

국토부가 지난해 11월부터 2개월간 강남 4개 구(강남·서초·송파·강동구) 8개 재건축 조합의 운영실태에 대해 서울시와 합동점검을 한 결과를 이날 발표한 것도 조합 비리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번 조사는 11·3 대책 때 분양권 전매 금지 등의 강도 높은 규제를 적용한 강남 4구의 재건축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실시됐다.

이번 점검에서 총 124건의 부적정 사례가 적발됐다. 6건의 심각한 법규 위반을 한 조합 3곳에 대해 경찰 수사를 의뢰하고 조합장 교체를 권고했다. 조사 결과 적발된 124건 중 예산회계(57건)·용역계약(29건) 등 자금 사용과 관련한 사례가 86건으로 전체의 70%를 차지했다. 나머지 38건은 조합행정이나 정보공개가 잘못된 경우였다.

관련 법령은 총회 의결 없는 계약에 대해 2년 이하 징역이나 2000만원 이하 벌금을 처하도록 하고 있다. 정보공개 위반은 1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에 해당된다.

정부는 조합운영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제도 개선을 추진하기로 했다. 조합의 ‘용역계약에 대한 업무처리 기준’을 만들어 조합에서 불필요한 용역을 발주하거나 과도하게 용역비를 지급하지 못하게 할 방침이다. 또 사업비가 애초보다 10% 이상 증가하거나 조합원 5분의 1 이상이 요청하면 조합은 한국감정원 등 공공기관으로부터 비용 검증을 반드시 받도록 했다. 1000가구를 짓는 데 들어가는 사업비가 공사비를 제외하고 750억원 정도다. 전문가들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재건축 비리를 줄이기 위해서는 조합장의 권한을 줄이는 게 핵심이라는 주장이다. 총회 의결 등의 규정이 있지만 조합장에게 위임되는 사항이 많아 조합장이 용역계약 등을 좌지우지하면서 각종 비리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정비업체 관계자는 “이사·대의원 등 일부만 장악하면 이권이 워낙 큰 각종 계약 등을 조합장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전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법이나 지자체의 조례 등으로 조합장 위임 범위를 줄이고 이를 지키지 않으면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시 등 일부 자치단체에서 시행 중인 공공관리제도 강화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정비사업이 주택시장에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민간사업이라 하더라도 지자체가 의무적으로 감독하도록 규정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장원 기자 ahnj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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