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엽제 - 질병 인과관계' 첫 인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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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엽제 피해 전우회원들이 26일 미국 제조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이긴 뒤 기뻐하고 있다. 이들은 월남전 참전 이후 고엽제 후유증을 앓아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고법 민사13부는 26일 '베트남전 고엽제 피해자' 2만600여 명이 "고엽제에 노출돼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며 미국 고엽제 제조사인 다우케미컬과 몬산토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피고는 원고 중 6795명에게 1인당 600만~460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 일부승소 판결했다. 나머지 1만3800여 명은 패소해 배상을 못 받게 됐다.

이번 판결로 원고들이 배상받게 될 총 금액은 630억7600여만원이다. 또 고엽제에 노출돼 각종 질병을 앓고 있다고 주장하는 다른 피해자들의 유사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된다.

전 세계적으로 고엽제를 둘러싼 국내외 소송에서 법원이 배상 판결을 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84년 미국.호주 등의 고엽제 피해자 20만여 명이 미국 법원에 낸 집단소송에서 유사소송을 우려한 제조사 측이 피해자들과 2억4000만 달러에 합의한 적이 있다.

◆ "고엽제에 노출됐을 개연성 크다"=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원고들의 군 복무 지역에 65년부터 73년 3월(한국군의 베트남 철수 시점)까지 고엽제의 유해물질(TCDD.다이옥신계 화합물의 일종)이 살포돼 참전자들이 이에 노출됐을 상당한 개연성이 있다"고 밝혔다. 이어 "원고들이 주장하는 고엽제 후유증 13가지 중 임파선암.후두암 등 11개 질병의 경우 고엽제와의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가 이번에 배상 판결을 내린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피해자들에게 엄격한 과학적 증명을 요구한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TCDD에 노출된 데 대해 명확한 입증을 요구할 경우 피해자들에 대한 사법적 구제를 사실상 거부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둘째, 재판관할권 등을 이유로 배상을 거부하는 것은 권리 남용이라고 봤다. 재판부는 "피고 측도 고엽제가 사용된 베트남전에 대한민국 국민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만큼 피해 발생을 예상했었고, 국내에서도 영업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국내 법원에 재판관할권이 있다"고 판단했다.

◆ "소멸시효 이유 배상거부는 신의성실 원칙에 반한다"=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인 '소멸시효'와 관련, 재판부는 "소멸시효를 이유로 배상을 거부하는 것은 민법상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한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전문가들도 고엽제.질병 간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게 쉽지 않은 만큼 전문적 식견이 없는 원고들이 제대로 소송을 내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원고들은 99년 "미국이 고엽제를 한국군 청룡.맹호.백마부대의 작전 지역인 광나이 등지에 뿌려 피해를 봤다"며 5조1000억여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1심 법원은 2002년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등의 이유로 원고패소 판결했다. 이번 소송은 국내 사법 사상 최대 규모였고, 인지대만 180억여원에 달했으나 법원은 인지대 납부를 유예시켜 줬다.

하재식 기자

◆ 다우케미컬.몬산토=다우케미컬은 1897년 설립된 미국의 대표적 화학제품 제조 회사. 몬산토는 세계적인 생명공학 기업으로, 유전자 변형 농산물을 생산해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다우케미컬과 몬산토는 전쟁 당시 미 정부에 공급된 전체 고엽제 중 각각 28.6%, 29.5%를 생산했다. 당시 미국이 살포한 고엽제는 4t 트럭 2만 3000대 분량이었다.

◆ 고엽제=미군이 베트남전 때 초목 등을 고사시키기 위해 밀림에 살포한 제초제. 밀림을 없애 게릴라전을 막고, 적군의 군량 보급을 차단할 목적으로 사용됐다. 1994년 6월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 군인 및 민간인 200여만 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해 말 현재 13만1910명이 고엽제 환자로 추정되고 있다. 유엔은 고엽제를 사용이 금지된 화학무기로 보고 베트남전쟁 이후 고엽제 사용을 감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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