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하원에서 발해까지 동서사 5천년의 베일을 벗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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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일 nhk취재…본사 독점연재>
황하는 흐름을 어림하기 어려운 대하다. 청해성 하원에서 대협곡을 쏟아져 내려 사막을 벗어나 황토고원을 가르며 달리는 분방한 기세와 쉴새없이 바뀌는 물길의 변동은 중국 북대륙을 몸부림치는 거대한 한 마리의 용에 비유되어 황룡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특히 대량의 토사를 휩쓸면서 황토고원을 꿰뚫고 흐른 황하가 대평원에 사태를 내면서 분류하여 대해에 이르기까지의 하류 유역은 격동하는 황룡의 꼬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때껏 축적된 엄청난 에너지는 하류 유역의 대평원에서 단번에 개방되어 둑이 터지고 범람하는 대이변이 수천년에 걸쳐 되풀이되었다. 그럴 때마다 황하의 물길은 때로는 북류하여 천진을 휩쓸고 발해만으로, 또 때로는 남류하여 회하의 물길과 합쳐 장강(양자강)으로 쏠리는 격심한 변동을 보였다. 황룡의 꼬리 말단부분에 해당하는 하구의 위치는 마치 시계추처럼 1천㎞ 가까운 진폭으로 크게 움직였던 것이다.
4천년 전의 우임금시대에 북방 천진을 향해 흐르던 것이 송의 고종 건염 2년(1128년) 이후는 남으로 흘러 황해로 나가는 일이 비교적 많아졌다.
금나라의 명창 5년(1194년), 대범람을 일으킨 황하는 둑을 무너뜨린 뒤 현재의 하남성 봉구에서 서주 남쪽으로 내려가 회하와 합류, 이 흐름이 6백61년간 계속되었다.
청의 함풍 5년(1855년) 농역 6월 중순, 역시 대홍수가 발생하여 난양의 동와상에서 둑이 터졌다. 그 뒤에 황하는 대청하를 합병하여 이진(현재의 동영시이진현)을 거쳐 발해만으로 흘러들게 되었고 차츰 현재의 물길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산동성 발해연안에 하구가 정착된 것은 기껏해야 1백30년 전쯤에 불과하다. 1855년 이전의 장기간에 걸친 거대한 물길의 진폭이 발해에서 황해연안 일대에 이룩한 대평원은 「고삼각주」라 불리고 있다. 그리고 1855년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산동반도 이북에서 하구에 형성된 델터지대가 「근대삼각주」다.
이 부채꼴의 지형은 동영시의 남영해를 삼각형의 꼭지점으로 하여 북쪽은 도해하구에서 남쪽은 지맥구구에 이르고 있다.
보통 이 삼각주지대를 가리켜 「황하하구지구」라 부르는데 공동취재반이 지향하는 하구는 그 끝자락에 펼쳐진 대니영(수렁)지대며, 황하가 대해에 흘러들어 장대한 여정을 마치는 지점이다.
조가옥자를 지나자 황하 북쪽기슭에는 「고도지구」라 불리는 비옥한 대지가 펼쳐져 있고, 유역에서 사는 농민은 이 개간구역에서 수확한 콩을 배로 운반해 온다.
건림의 도선장을 지나자 황하의 너비는 엄청나게 넓어져 넉넉히 1㎞는 넘는 것 같다. 인적 없는 제방을 1시간쯤 달리자 하나의 조그마한 도선장이 나타났다.
「최말」이라는 이 도선장을 지나면 앞쪽에는 인적 없는 들판에 제방도 마침내 끝난다. 그 저편에 펼쳐진 끝없는 수렁지대를 굵은 띠를 이룬 황하가 종횡으로 흘러 발해만으로 들어간다.
겨울철에는 사람들이 얼음 위를 걸어서 건너다닌다고 한다.
『겨울이 아니더라도 옛날엔 얼마든지 걸어서 고도의 밭까지 다녔지요.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황하는 훨씬 북쪽을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이 물길은 육지였거든요.』
소달구지를 끌고 나온 농부 풍씨의 말이다. 그에 따르면 앞서 통과한 건림의 도선장 지점에서 동쪽으로 크게 흐름을 바꾼 것은 1976년의 일이라 한다.
중공 성립 초에 황하는 첨수구·신선구·송춘영구의 세 갈래로 갈라져 바다로 흘러들었으나 1953년에 둑이 붕괴되어 물길이 모두 신선구에 휩쓸리게 되었다.
1964년 12월, 얼어붙은 황하는 건림의 도선장 부근에서 범람했다. 이듬해 1월 초순, 물길을 확장하기 위해 안쪽 제방을 폭파하여 넘쳐난 흐름은 신선구로 몰렸다가 다시 북쪽 조구하로 쏠려 황하는 북류하며 바다로 향하게 되었다.
1855년, 대청하를 합병하여 발해만으로 흘러들게 되면서부터 오늘날까지 대략 10년 내지 15년을 주기로 이러한 물길 변동이 발생하고 있다. 물길의 변천은 물론 토사의 퇴적에 따른 하상의 변화 때문이다. 『황룡이 꼬리를 휘두른다』고 옛날부터 말해 온 이러한 순환은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인데 제멋대로 요동치는 용의 꼬리를 억누르는 시도가 근년에 이루어지고 있다.
유전이 개발되어 그에 따른 황하델터의 황무지에 많은 사람들이 옮겨가서 살게되자 치수가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1백여년의 물길 변천 기록이 동영수방소를 비롯한 황하수리위원회·산동성황하하무국 등 관계기관에 의해 세밀히 검증되었다.
그 결과 당시 l2년간 북류를 계속하고 있던 조구하도의 퇴적은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되어 1976년 5월 인공적으로 물길의 변경이 이루어져 현재의 흐름이 되었다고 한다. 도도히 흐르는 광대한 물길을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바꾼 것일까.
건림의 도선장에서 쌍동선 페리를 타고 옛 물길이 있는 대안으로 건너가 본다. 1만㏊ 이상이 개간돼 있는 고도지구다.
고도의 남쪽에는 제남군구에 소속된 목장이 곳곳에 흩어져있다. 60년대에 승리유전이 발견된 몇 년 뒤 군마의 육성을 목적으로 설치된 목장이다.
옛 황하의 흔적을 따라 고도의 북으로 향했다.
15㎞쯤 북상한 곳에 가늘게 난 수맥은 갑자기 5백m 사방 정도의 소택지를 이루었다. 그것을 분단하는 포장도로가 다리처럼 가로질렀는데 도로 밑에는 돌축대가 쌓여 물이 북으로 향하는 것을 막는 형국으로 되어 있다.
『1976년 5월19일이었어요.』 군목장의 주과장이 기억을 더듬었다.
『때마침 속을 뿌리는 바쁜 철이었는데 양쪽 기슭은 농민들·아이들·고도유전의 노동자 등 대군중이 들끓었죠. 5월은 수량도, 이사량도 가장 적은 때입니다. 그날까지 조금씩 돌을 물밑에 가라앉혀 나가다가 19일 이른 아침부터 단번에 물길을 막은 겁니다. 양쪽 기슭에서부터 점점 돌이 높이 쌓여 저녁나절 늦게 완전히 황하를 막았을 때는 숨을 죽이듯 하면서 바라보던 군중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농민도, 어민도 황하를 의지하고 살았으니까…. 관개용수로를 다시 만들어 농민들은 살아남았지만 이 유역에서 지내던 어민은 모두 황하와 함께 동쪽으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이 지점에서 황하를 막기까지 새로 물길이 될 청수구에서는 준설·호안공사가 수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5월20일, 황하의 흐름이 정지하는 동안 15㎞ 하류의 나가옥자에서 제2의 물길을 막는 공사가 박차를 가했다. 그로부터 1주 후 수위가 한계에 이르자 둑이 파괴되어 노도처럼 넘쳐난 황하의 물은 계획대로 청수구로 유도된 것이다.
이만한 대규모의 인공적 물길 바꾸기 공사는 황하치수사상 전례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용의 꼬리가 이렇게 해서 억눌린 뒤에 이미 1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하상이 계속 높아져 마침내 청수구의 황하 물길은 정해진 자연 사이클의 만기에 접어들었으며 다시 한번 용의 꼬리를 옮기는 대작전이 올해 들어 정식으로 스타트했다.
공동취재반은 마지막 캠프지에서 1시간 반, 15㎞쯤 전진했을 때 하구에 이르렀다. 하구를 중국어로는 「입해구」라 한다. 눈앞에는 오직 황색 진흙펄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 황하의 흐름이 그에 막혀 있는 것 같다.
타고 간 돛배에서 고무보트로 갈아타고 간석으로 향한다. 고무보트도 이윽고 정지한다. 무릎 깊이의 물 속에 내려선다. 황갈색 간석 위에 하얀 갈매기 떼, 그리고 저 멀리 발해만에 파도가 아른거린다. 마치 신기루 같다.
1년 반에 걸친 여정이었던 전장 5천4백64㎞의 끝이다. 말할 수 없는 감회가 북받친다.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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