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다수근로자의 소리|김창욱 <사회부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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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7, 8월 두달 전국을 횝쓸었던 노사분규의 거친 물결이 일단 가라앉고 있다. 진정 국면의 밑바닥에는 여론의 흐름 변화가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다.「6·29」후 곳곳에서 노사분규가 시작됐을 때 여론은 이를 「근로자들의 누적된 불만의 분출」이며 「민주화의 길목에서 불가피한 진통」으로 보고 근로자들 쪽에 더 따뜻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사태가 홍수를 이뤄 일부에서이긴 하지만 폭력·난동사태가 벌어지자 여론은 서서히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성원이 관망으로, 관망이 우려로, 우려가 점차 비판으로 바뀌는 기미에 정부는 노사 자율해결원칙을 부분 수정, 폭력 일탈에 공권력개입으로 제동을 건 것이다.
사태가 진정돼가며 신문사엔 많은 근로자들의 「이유 있는 항변」도 쏟아지고 있다.
『기업주를 감금·모욕하고 시민을 폭행하는 것등은 자제력을 잃은 극소수가 저지른 실수인데 마치 전체 근로자들의 잘못인 것처럼 대서특필하는 것은뭡니까.』
『사태의 본질은 근로자들의 생존권 주장인데도 이 점은 놓아둔채 이처럼 도매금으로 넘기면 선량한 근로자들은 억울한 사정을 어디다 호소합니까.』
「선량한 다수 근로자」들의 호소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6·29」후 발생한 3천건이 넘는 노사분규중 외부세력이 배후에서 조종하거나 폭력을 휘두른 사례는 실제로 일부 소수다. 거의 대부분은 보다 나은 처우, 인간적인 대접을 요구하는 근로자들의 순수노동쟁의라고 당국에서도 분석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의 심각성은 비록 일부라도 극렬한 소수가 온건한 다수를 가리고마는 집단행동의 메커니즘에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과격이 과격을 확대재생산하는 메커니즘에 따라 온건은 비록 수적으로 다수라도 과격한 소수에 묻혀들고 끌려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여론은 방향을 바꿀수밖에 없고 정당한 주장·요구조차 설자리를 잃는다.
교훈은 자명하다. 폭력은 문제해결의 수단이 절대로 될수 없다는 명제다. 이제부터라도 쌍방이 절대로 폭력을 배제하고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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