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손 31세 이치억씨 한문 가르치는 훈장 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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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퇴계 이황 선생의 후손인 이치억(오른쪽)씨가 서울 종로구 동인문화원에서 어린이들에게 사자소학을 가르치고 있다. 김상선 기자

"부모님께 물건을 드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꿇어 앉아서 두 손으로 전해야 합니다. 헌물부모(獻物父母) 궤이진지(而進之). 자, 따라해 보세요."

서울 익선동 동인문화원(원장 이기동 성균관대 유학.동양학부 교수)이 겨울방학을 맞아 이달 초 문을 연 청소년 대상 한문강좌. 유건을 쓰고 도포를 입은 아이들이 '훈장' 이치억(31)씨의 말이 떨어지자 '헌물부모 궤이진지'를 목청껏 외친다. 흡사 과거의 서당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느낌이다.

"천방지축인 장난꾸러기들이 세 시간 동안 양반 다리 자세로 앉아있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죠. 그래도 얼마나 의젓한지 몰라요."

어린 제자들을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훈장 이씨는 성균관대 박사과정(유교철학 전공)에 재학 중인 학생이자, 퇴계 이황 선생의 17대 손이다. 그에게선 어딘가 요즘 젊은이답지 않은 점잖은 분위기가 풍겨나온다. "경북 안동에 있는 퇴계 종택에서 나고 자랐거든요. 아침 저녁으로 부모님과 조부모님 이부자리를 개고 펴드렸지요. 외지에서 집에 돌아오거나 나갈 때면 방문 밖에서 큰절을 올리고요."

그런 집안 분위기 덕분에 한글보다 한문을 먼저 깨쳤다. 다섯살 때부터 조부(이동은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천자문과 서예를 배웠다. 과연 대학자의 후손답다고 했더니 이씨는 "퇴계의 후손이란 게 너무 부담스러웠고, 공부하기 싫어 도망다니기 일쑤였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반항심은 더욱 커졌다고 했다. 자신은 소설가가 되고 싶은데 부모님은 한문학 전공을 원하셨기 때문이었단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 도쿄의 메지로(目白)대로 유학을 가 지역학(아시아)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귀국해 군 복무를 마치고 성균관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전공인 성리학 분야 서적들을 열심히 읽어 나갔다. 퇴계의 저서도 접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고 했다.

"유교철학을 어떻게 하면 현대에 되살릴 수 있을까 궁리 중이에요. 사람들이 '유교=케케묵은 관습'이라는 오해를 풀고 효(孝)와 인(仁)의 사상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이씨는 퇴계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었던 도산서당(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이 제 모습을 찾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품고 있다고 했다.

문화재와 관광지로만 남아 있는 그곳에 대안학교를 열어 유교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동인문화원 '훈장'외에 경기도 고양시 고양향교에서 한문 강좌도 맡고 있다.

신예리 기자<shiny@joongang.co.kr>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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