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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백수들아, 우리 보고 웃으면 안 되겠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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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 ‘현대생활백수’의 주인공 고혜성씨(左)와 강일구씨가 능청스럽게 코너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사진=강정현 기자]

"일구야, 자장면 가져올 때 단무지 그릇에 깐풍기 조금 담아오면 안 되겠니?"

백수를 상징하는 파란 '츄리닝'에 당장이라도 까치가 날아들 것 같은 머리.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휴대전화로 중국집 주인을 괴롭힌다. 자장면을 반값에 달라고 하고, 서비스로 군만두까지 챙겨달라는 황당한 요구에 중국집 주인은 기가 막힌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그래도 백수는 기죽지 않고 외친다.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딨니."

'안 되겠니'라는 유행어를 퍼뜨리며 자칭 '부탁 개그'의 창시자로 떠오른 고혜성(31).강일구(26) 콤비. 이들의 '현대생활백수' 코너(KBS-2TV '개그콘서트') 때문에 사는 재미가 생겼다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값을 깎아달라며 무작정 억지를 부리는 '백수'(고혜성)와 그에게 늘 당하기만 하는 업주 '일구'(강일구). 이처럼 단순한 구도의 코너가 왜 인기를 끄는 것일까. 청년실업이란 암울한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하면 된다'는 1970년대 향수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일까.

"시대정신이고 뭐고 그런 거 전혀 없었어요. 돈 없는 청년이 무조건 물건값 깎는 것이 주 컨셉트예요. 사실은 레크리에이션 지도를 하는 한 선배의 말투에서 모티브를 따왔어요. 지도비로 50만원은 챙겨야겠다는 후배에게 '40(만원)은 안 되겠니? 형이 (소개비조로) 10(만원)은 먹어야 되잖니'라고 말하는 걸 듣고 번쩍 했죠."(고혜성)

이들 말대로 거창한 '시대정신'은 없다고 치자. 그러나 관객과 시청자들은 이들의 개그에서 시대를 읽는다. '형이 직장은 있거든. 근데 월급이 안 나와. 월급 나오면 곱빼기 시킬게' '일구야, 모두가 아니오 할 때 예 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거야' 등 전혀 기대하지 않던 대목에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을 때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시청자게시판에는 '웃기면서도 가슴이 찡하다' '옛날 백수시절이 떠오른다'는 글도 올라온다. 개그계에 입문하기 전 준(準)백수생활을 거쳤기 때문일까. 고씨의 백수 연기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월급 봉투란 걸 받아본 적이 없어요. 학습지 외판원, 퀵서비스, 대리운전, 간판제작업, 레크리에이션 강사 등 안 해본 게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굶어본 적도 있었죠."

지난해 6월 아마추어 개그맨들의 등용문 '개그사냥'(KBS- 2TV)에서 '일구'와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고, 그들은 '안 되겠니' 개그로 지난해 11월 말 꿈의 무대인 '개콘'에 입성했다.

백수는 요즘 더 뻔뻔해졌다. 일구가 나름대로 반격을 하면 딴 데를 쳐다보며 '그만 얘기하자'고 말을 끊는다. '적반하장'에 '안하무인'까지 더해진 것이다. 이들은 코너가 식상해질까 봐 후속까지 마련해 놓았다. 은둔하던 백수가 밖으로 나와 이발소, 목욕탕, 수퍼마켓, 노래방 등을 전전하며 업주를 괴롭히는 것이다. 좀 더 철이 들면 입사시험도 보면서 면접관들을 황당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첫 CF(온라인게임)촬영을 마친 소감을 물었다. "감격 그 자체죠. 그런데 광고주가 '모델료 좀 깎아주면 안 되겠니?'라고 우겨댈까 봐 조금 걱정되던데요."

글=정현목 기자 <gojhm@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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