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록 80년 서울의 봄(2)"계엄의결 순간에도 「유고」내용 몰랐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3면

79년 10월27일 새벽 4시20분 김성진 문공장관은 중앙청 기자실 흑판에 정부발표문을 써내려 가고 있었다.
『79년 10월26일 23시에 긴급 소집된 임시국무회의는 대통령의 유고로 인하여 국가의 안전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79년 10월27일 오전 4시를 기해 전국일원(제주제외)에 비상계엄을 선포키로 의결했다.
비상계엄사령관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 육군대장을 임명했다. 이 발표는 대통령권한대행 최규하 국무총리의 이름으로 발표되는 것이다. 정부는 헌법 48조 규정에 따라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여 수행하게 되었음을 79년 10월26일 23시에 보고했다.』
중대발표 연락을 받고 달려왔던 기자들은 비상계엄은 예상했었지만 대통령유고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김장관, 대통령의 유고가 무슨 뜻입니까.><…><유고의 의미를 설명해 주십시오.><대통령 유고에 관해서는 차차 말씀드리겠습니다. 보도관제에 협조해 주십시오.>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에도 김장관은 『9시30분에 유고 내용을 밝히겠다. 그때까지는 아무런 상황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랬는데 유고 내용은 예고된 시간보다 2시간이 이른 7시20분 발표됐다.

<유고가 무슨 뜻입니까>
『박대통령은 10월26일 저녁 6시 궁정동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만찬도중 김재규 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간의 우발적 충돌사고가 야기되어 김부장이 발사한 총탄에 맞아 10월26일 오후 7시50분께 서거하셨습니다…. 차실장을 포함한 5명도 사망했으며 김부장은 지금 계엄군에 의해 구속수사중입니다….』
대통령의 유고는 유고가 된 시간으로부터 8시간 30분이 지나서야 국민 앞에 발표됐다. 유고가 서거라는 사실을 알린 것은 다시 3시간 후, 그러니까 서거한 시간에서 근 12시간이 지났다. 너무도 심각한 돌발사건으로선 그리 오래 비밀에 부친 것은 아니랄 수도 있다. 우리가 되짚어볼 일은 그날 밤 위기에 대처하던 정부의 모습이다.
그날 비극의 사건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으로서 맨 먼저 대통령서거를 안 것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다. 그는 군의 비상태세엔 재빨리 행동했다. 그러나 사건의 진정한 내막은 상당시간 알지 못했던데 문제가 있었다.
최규하 총리는 국무위원중 대통령서거를 맨 먼저 알았다. 그는 김재규의 총탄에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사실도 알았고 그 순간부터 대통령권한대행이라는 막중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날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은 그때로선 김재규가 대통령을 겨냥해 저격한 것인지, 차지철과의 충돌에서 우발적으로 대통령까지 저격했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했다.
궁정동의 「대행사」를 통고 받고 미리 궁정동에 와서 대기해 있던 시간 김재규 부장이 차지철을 해치울까보다고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차지철을 혼내주어야겠다, 없애버려야겠다고 곧잘 말해온 그 무렵의 김부장이니 그런 얘기로 흘려버렸다는 것이다.
상황파악이 뚜렷하지 않았던 것은 방도 어둡고 주량도 많았던 탓이 아닐지 모르겠다. 궁정동 만찬에 가수도 부르는 이른바 「대행사」는 그리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달에 한번 정도였다. 그날도 조명을 낮춰 방은 겨우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어슴푸레한 상태였다. 술은 시바스 리걸 한 병을 비우고 두 번째 병을 따 주전자로 옮겨 부은 직후다.
술은 네 사람 중 대통령과 비서실장만이 마셨다. 차지철은 원래 술을 안마시기도 하지만 대통령 경호실장으로선 대통령과의 자리가 경호업무의 연장이기도 해서 단 한 방울도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게 관례다. 김재규 부장은 건강 탓도 있었지만 호스트가 되는 셈이어서 역시 술은 마시지 않는다. 두 사람은 물로 술을 대신하고 술은 대통령과 김실장만 마셨으니까 대통령과 김실장이 각각 반병쯤 마신 셈이다. 그런 때 총성이 터지고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쓰러졌다.
김재규는 일을 벌인 후 신발도 신지 않은 채 사라졌다. 김실장으로선 김재규가 무슨 일을 어떻게 벌일지는 어림할 수도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다. 대통령의 시신을 국군 서울병원으로 옮기는 등 그런 대로의 뒤처리를 했다. 병원을 나서 청와대로 오면서 택시를 탔는지 걸어왔는지조차 기억이 뚜렷하지 않는 김실장이었다.
청와대 비서실장실로 돌아와서야 얼마쯤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김실장은 총리공관으로 최총리에게 긴급사태니 즉시 청와대로 와달라고 했다. 최총리는 곧 왔다.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궁정동 만찬자리에서 김재규와 차지철이 다투다 김재규가 쏜 총탄에 각하가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이 순간부터 총리께서 대권을 장악하셔야 합니다. 저는 비서실장으로서 분부를 받들겠습니다』라고 김실장은 말했다.

<대통령·김실장만 음주>
최총리에게 긴급사태를 보고한 후 김실장은 경호실 차장 이재전 중장을 불렀다. 『경호실장이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당신이 병력을 장악하고 수비를 강화하시오. 국가의 중대사건이 발생했는데 지금은 그 이유는 말할 수 없소. 경거망동은 말고 병력을 단단히 장악하시오』라고 말했다.
뒤이어 김치열 법무·구자춘 내무·박동진 외무가 들어왔다. 김실장은 그들에겐 긴급사태라고만 말했을 뿐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구내무는 <뭘 설명해 주셔야 경비를 지시할 것 아닙니까>라고 졸랐지만 아무 말을 안 했다.
김실장으로선 최악의 사태까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새 질서를 빨리 세우는 것이 원치 않는 충돌사태를 막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각료에게 사태를 알리는 일도 대통령권한 대행이 된 최총리가 판단해 행할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는데 육본 벙커에서 전화가 왔다. 노국방에게 총리도 나와 계시니 청와대로 오라 했는데 도리어 그쪽에선 총리 모시고 오라고 했다. 망설이는데 김재규가 전화를 바꿔 총리 모시고 오라고 했다. 김재규가 육본 벙커에 가 있다는데서 김실장은 얼마간 안도를 했다. 그래서 총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육본 벙커로 갔다.
최총리는 긴 시간 침통한 침묵 속에 있었다. 육본 벙커에서도 거의 말을 안 했다. 그 때문에 각료들이 대통령의 유고를 안 시간이 모두 다르다. 대통령의 서거를 알기까지는 더욱 시간이 걸렸다. 비상계엄을 의결하던 순간에도 대통령의 서거를 몰랐다고 기억하는 관계자도 있다. 그리 오래된 일도 아닌데도 그날 밤을 말하는 국무위원들의 기억은 흐린 부분들이 적잖다. 긴장과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그날 위기관리에 나섰던 국무위원 등 관계자의 기억을 되살려 보자.
▲최택원 총무처차관=10월25일 심의환 총무처장관의 총무처장을 치르고 26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삽교천에 갔어요. 심장관의 장례는 장례절차를 놓고 유가족들과 약간의 이견이 있었던 터라 심신이 몹시 피곤했어요. 삽교천에서 훈장수여 행사를 했지요. 대통령 일행은 딴 곳을 들른다며 먼저 헬기로 떴고 우리 일행은 차로 왔어요. 서울로 오자마자 집으로가 쉬고 있는데 밤 10시 조금 못돼 전화가 왔어요.
합동참모본부장이라고 자신을 밝히는데 전화목소리가 귀에 익어요. 분명 유혁인 정무제1수석비서관이예요. 그런데 그는 계속 자신을 합동참모본부장이라면서 밤 11시에 국방부상황실에서 국무회의를 열도록 하라고 해요.
국방부 상황실이란 게 이상하잖아요. 도대체 국무회의를 국무회의실 아닌 곳에서 열 이유가 있어야지요.

<국방부 상황실이라니요.>

<글쎄 그렇게 하시라니까요.>

<비상국무회의를 이 밤중에 여는 것도 그런데 국방부 상황실에서 연다니 설명이 있어야될게 아닙니까.>
유비서관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지금 제 옆에는 총리도 계시고 관계장관들도 있습니다. 밤 11시 국방부상황실입니다. 차질 없게 해주십시오.>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10시가 막 되려는 순간이었어요. 곧 총무국장 집에 전화를 했어요. 그리고는 이유는 모르지만 그 시간에 국무회의를 국방부에서 여니 차질 없이 연락하라고 지시했어요. 며칠 전 부마사태 때도 한밤중 비상국무회의를 소집해 부산·마산지역 계엄을 선포한 일이 있는데 그때 총무처의정과의 전화가 단 3대밖에 없어 고생을 했기 때문에 곧바로 전화기도 늘리고 인원도 추가 배치해 연락에는 차질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나도 차를 불러야 했는데 총무처에 남아있는 차는 야통증이 없어 비서를 시켜 운전기사를 수배했어요. 차를 타고 삼각지로 가는데 별 생각이 다 들어요. 일제시대 일본군한테 당한 생각, 6·25때의 생각 등등…. 육사 5기 출신인 나로서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요. 차를 타고 가면서 하늘을 봤어요. 전쟁이 났으면 제일먼저 폭격기가 뜰텐데 하늘엔 별만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어요. 전쟁은 아닌가보다. 적어도 전면전은 아니다. 그렇다면 서울시외에 폭격이? 그것도 아니다. 시내가 조용한걸 보니….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국방부에 도착한 것이 10시30분. 벌써 문 앞에는 병력이 배치되어 신분을 확인하고 들여보내고 있었어요. 상황실 부속실에 들어가니 총무처 직원 몇과 장관 7명쯤이 있었어요. 모두들 무슨 영문인지 몰라해요. 상황실에 가 앉아있는데 한사람씩 들어와요. 육사 후배이자 굉장히 친했던 황인성 교통에게 물어봐도 역시 모른다는 대답이었고….

<서명할 때 이유 써넣어>
11시가 넘어도 총리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상황실 다른 쪽 문으로 노국방이 들어와요. 그래 얼른 그 앞으로 달려가 넘겨짚었지요.

<장관님, 안보회의 의원들도 소집시켜야지요.> 그러자 노강관은 잠시 나를 보더니 <아 그럴 필요 없어요>라고 해요. 이때서야 전쟁은 아니구나 했지요. 그렇다면 뭘까. 부마사태가 확산된 것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총리가 들어왔습니다.
무거운 얼굴의 총리는 자기자리에 앉자마자 『국무위원이 아닌 사람은 모두들 나가시오』라면서 이규현 총리비서실장과 국무회의 간사인 총무국장을 내보냈어요. 자리가 정리되고 상황실 문이 닫히자 총리가 곧바로 개의를 선포하고 『국가 중대안위에 관련된 문제로 비상계엄을 선포해야겠으니 국방장관은 안건을 제안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국방장관도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할 것을 제안했어요. 이때 제주도를 제외한 것은 이유가 있지요. 전국을 범위로 하면 계엄사령관은 대통령의 지휘를 바로 받지만 일부 지역이라도 제외되면 계엄사령관은 국방장관의 지휘를 받게되어 있어요…. 이유도 모르는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국무회의 석상에 앉아있는 내 모습이 초라했고 그 보다는 국가운명이 어찌되는가가 너무도 걱정스러웠어요. 용기를 내 손을 들었지요. <총리님, 이유를 말씀해주십시오.> 그랬더니 국가안위에 중대한 문제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시간이 좀 흘렀어요. 김성진 문공장관이 새 제안을 했어요. 지금 비상계엄선포를 의결하고 10분간 정회하자는 것이었어요. 모두들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나는 회의실을 나와 의정계장에게 비상계엄선포 의결에 따른 서류를 만들도록 지시했지요. 의정계장은 장관부속실로 가 직접 타이프를 쳐 서류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러나 10분이라던 정회는 20분이 지나도 속개될 줄 몰랐습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 시간에 총리와 몇 장관이 대통령의 시신을 확인하러 국군 서울병원에 갔다온 것이었어요.
25분인가 30분쯤 지나 총리 일행이 회의실에 들어와 회의가 속개됐어요. 나는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비상계엄선포에 관한 서류를 들고 총리 앞에 갔습니다. 서류에는 그때까지도 선포이유는 공란이었지요. 최총리는 펜을 들더니 선포 이유란에 대통령의 유고라는 글을 써넣었어요. 그때서야 대통령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게됐지요. 그후 장관들이 돌려가며 사인을 했고 신부총리가 유고의 내용이 대통령의 서거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최우규 상공=국방부 상황실에서 긴급 국무회의라고 해 순간적으로 며칠 전 부마사태로 심야국무회의를 열어 지역계엄을 선포한 일이 있어 서울에도 비슷한 사태가 일어났나 했지만 그렇다해도 왜 국방부인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혹시 휴전선에 문제가 있다 해도 장소가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자동차를 부르느라 10시가 지나 출발했는데 상황실까지 가는 길은 조용했어요. 들어갔더니 국무위원 반수가 나와 있었다고 기억돼요.
서로 무슨 영문인지 몰라 완전히 침묵의 상황이었어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국방부 상황실로 들어선 때는 김재규는 체포된 직후고 총리 등이 병원에 가서 확인하고 돌아오는 시간이었다고 해요. 아뭏든 상황실은 서로가 물어볼 엄두도 못내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처음에 내가 갔을 때는 총리도 부총리도 없었어요. 한참 후에 총리·부총리, 그리고 안보관계 장관들이 함께 들어왔어요.
최총리가 자리에 앉더니 『대통령께서 유고가 되셔서…국가안위에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다』고 처음으로 유고라는 말을 썼어요. 최총리가 그 말만 하고 머뭇거리자 노국방·김법무 등이 『총리께서 말씀을 하십시오. 국무회의에선 밝히셔야지요』라는 등 종용을 하자 최총리가 『청와대 김계원 실장을 만났다.
궁정동에 가서 저녁을 하시다가 김재규와 차지철간에 언쟁이 벌어져 서로 총질을 하다가 각하께서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고 『관계장관들과 병원에 가서 확인하고 왔다』고 처음으로 사망사실을 얘기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대통령이 말리려다 유탄에 맞은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어요.
김재규가 총을 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한바 없어요…. 최총리가 유고 사실을 알리고 신부총리가 헌법절차에 따라 최총리가 대통령직을 승계, 대통령권한대행이 됐다고 선언했어요. 직후 최총리가 계엄선포를 해야한다고 하자 각 부문별 소관에 대해 토론이 벌어졌어요. 예컨대 휴교령을 어디까지 적용할 것이냐, 계엄 하에도 국회기능은 살아있는데 정당 활동은 어떻게 할 것이냐 등을 논의했는데 결론이 나지 않았어요.
다만 계엄선포는 통금해제 시간으로 한다는 데만 합의했던 것 같아요. 계엄선포 의결 때 제주도를 제외하느니 하는 문제는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기억해요. 사실 전국계엄과 일부지역 제외 때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권이 어찌되느냐는 건 그때는 대부분의 국무위원이 알지도 못했으니까요. 부문별 문제로 설왕설래 중에 정승화 총장이 계엄포고령 초안이 준비됐다고 보고하고 내용을 읽었어요. 별도 유인물이나 브리핑 차트 등은 없었고 정총장이 종이를 손에 들고 읽더군요. 그때도 부분계엄이니 하는 얘기는 없었다고 기억해요.

<경제장관 회견합시다>
계엄선포 토의를 끝내고 다음날 아침 중앙청 국무회의실에서 다시 회의를 열기로 한 후 회의를 마쳤어요. 신부총리가 경제부처장관은 남아서 얘기를 하자 해서 모였지요. 긴 얘기는 없었고 신부총리가 경제혼란을 최소한으로 막고 국가경제나 일상생활에 차질이 없도록 정부가 최선을 다 할 테니 국민은 정부를 믿고 따라 달라는 내용의 발표를 다음날 아침 경제부처 공동회견을 통해 하자고 제의해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후 집으로 돌아와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아침에 중앙청으로 가는 길에 라디오에서 경호실 직원이 죽었다는 얘기가 나와요. 그래 또 의아한 생각을 했어요. 27일 아침 국무회의에서 노국방장관이 궁정동 모임에서 김재규 체포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소상히 설명했지요. 그때서야 진상을 알았어요.
황인성 교통도 상당시간 사태를 몰랐다고 했다.
밤 10시쯤 연락을 받고 갔더니 장관 서너명이 있어요. 구내무에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지만 설명이 없었지요. 장관들의 표정이 굳어있긴 했지만 전쟁은 아니구나했어요. 그저 심정적으로 대통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정도였어요.
최종완 과학기술처장관도 처음엔 영문을 몰랐다는 점에선 모두의 얘기와 같다.
『구자춘 내무가 가끔 들락거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나라에 큰 변이 생겼습니다>고 해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이분이냐>고 묻자 긍정하는 듯한 표정이긴 했으나 대답은 하지 않았어요. 이어 최총리가 들어오더니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유고라고 얘기했는데 확실한 기억은 없지만 <총질을 했다>는 말이 기억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