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故방일영씨-56년간 조선일보 이끈 언론경영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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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8일 별세한 우초(愚礎) 방일영 전 조선일보 고문은 오늘의 조선일보를 일궈낸 언론 경영인으로 언론계의 거목(巨木)이다.

"형님이 안 계셨더라면 조선일보는 결코 오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1999년 3월 18일 고문직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언론인 방일영'을 보내는 자리에서 동생인 당시 방우영 회장(현 명예회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55년 3백47일간의 재직-. 방일영이란 이름 석자가 조선일보사(史)에 남긴 발자취가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23년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난 고인과 조선일보의 만남은 43년 4월 시작된다. 광산에서 일군 부(富)로 조선일보를 인수한 할아버지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의 비서 자격으로 입사한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조선일보가 폐간된 상태여서 '조선일보 없는 조선일보사'와 첫 인연을 맺은 셈이다.

고인은 한국전쟁 중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납북으로 회사의 운명을 떠안게 된다. 그의 나이 서른즈음이었다.

엄청난 빚더미와 인쇄시설의 파괴, 뿔뿔이 흩어진 사원들…. 최악의 상황 속에서 그는 스스로 윤전기를 손질하고 사채를 얻어 쓰면서 조선일보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위탁 경영'까지 갔던 난국을 극복하고 54년 사장에 취임한 고인은 55년 지령 1만호를 발행하면서 중흥의 기틀을 다졌다. 고인은 64년 동생 방우영 명예회장에게 사장직을 물려주고 회장에 취임했다. 그러나 70~80년대 막후에서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해 조선일보의 발전을 주도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고인은 "신문은 기자가 만들고 경영인은 그들을 뒷바라지한다""재정적 독립이 무너지면 신문은 권력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을 경영진들에게 자주 강조했다고 한다. 또 "훌륭한 인재가 최고의 신문을 만들어 낸다"는 신념으로 인재 등용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믿음에 따라 홍종인.천관우.선우휘씨 등 당대 논객들을 줄줄이 영입했다. '사람 쓸 때 권력의 눈치를 안 본다''한번 연을 맺으면 끝까지 돌본다''일단 일을 맡겼으면 중도에 간섭하지 않는다' 등이 고인이 평소 밝혔던 '용인(用人)의 원칙'.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조선일보를 떠나 서울신문 편집국장으로 옮길 때 고인에게서 들은 얘기는 "재희! 빌려주는 거다. 언제든지 다시 와"였다고 한다.

지인들에 따르면 고인은 일 외의 시간엔 술을 마시고 국악을 듣고 산에 오르는 것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특히 당뇨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기 전까지 대단한 주력(酒歷)을 자랑했다. 고인의 변(辯)은 이랬다. "어려서는 호기심으로 마셨고, 젊어서는 나 자신의 생활을 메워보려고 마셨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회사를 위해 마셨노라."

고인은 한국신문발행인협회 이사장(63년), 국제언론인협회(IPI)한국위원장(76년) 등을 지내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도 펼쳤다. 방일영 문화재단을 설립하고 방일영 국악상을 제정하는 등 부(富)의 사회환원에도 기여했다. 이런 공로로 82년과 99년 각각 국민훈장 무궁화장과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이상복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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