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책읽기] '샤먼의 코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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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의 코트/안나 레이드 지음, 윤철희 옮김/미다스북스, 1만3천5백원

"내 모가지 둘레에/그들은 모서리가 네 개인 황금 십자가를 걸었다/우리 아버지가 신령님들께 바치곤 했던 말 기름이 넘쳐흐르는 접시를/이제 나는 바칠 수 없을 것이다/적어도 수천 번의 해가 뜨고 지기 전까지는."

시베리아 서부 지역에 사는 한티족에 내려오는 민요다. 러시아 원정대 앞에 무릎을 꿇었던 그들의 갑갑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된다.

대대로 믿어왔던 신앙을 하루 아침에 잃어버리고 차가운 십자가를 강요받았던 그들은 더위 먹은 병아리마냥 무기력하게 카자크(제정 러시아의 비정규군으로 편입된 농민 집단)에게 사로잡혔다.

나뭇잎 모양의 카누를 타고 물고기를 잡았고, 물고기 턱뼈를 이용해 물결 무늬와 소용돌이 무늬의 문신을 새겼던 한티족의 문화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샤먼의 코트'는 신비감이 물씬 풍기는 제목과 달리 선홍빛 피와 잔인한 학살로 얼룩진 끔찍한 보고서다. 영국 출신의 젊은 사학자인 안나 레이드가 우랄 산맥부터 태평양 연안까지 '동토의 왕국' 시베리아를 순례하며 역사의 숨겨진 구석을 파헤쳤다.

답사 결과는 꽤 충격적이다. 한민족의 기원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시베리아의 참혹한 과거가 양파 껍질 벗겨지듯 하나 하나 드러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을 쫓아내고 수립된 미국, 잉카.아스텍 문명을 짓밟은 남미 스페인 문화, 토착 원주민을 몰아내고 들어선 호주 등지에서 엇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래도 책은 상당히 당혹스럽다. 시베리아를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땅, 차디찬 툰드라의 영토로만 바라봤던 우리의 백지와 같은 무지를 부끄럽게 한다.

스탈린 시대 사할린에서 수천만리 떨어진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송됐던 한민족의 한 맺힌 경험이 시베리아에선 수백년 전부터 있었던 것. 물론 1차 책임은 이 문제를 덮어두려고 했던 러시아 당국에 있다.

저자는 타타르.한티.부랴트.투바.아이누 등 모두 아홉개의 시베리아 소수 민족을 탐사했다. 전래민담부터 KGB(구 소련 비밀첩보조직) 보고서에 이르는 방대한 참고문헌, 현지 주민.정책 당국자 등의 증언을 종합해 이곳 원주민의 민족적 정체성을 찾아나섰다.

'샤먼의 코트'는 거대한 수난사다. 16세기 말 러시아 군인 예르마크가 이곳을 처음 침략했던 때부터 스탈린의 공포정치를 거쳐 최근의 석유 탐사 붐까지 지난 4백여년간 설자리가 계속 좁아졌던 시베리아 원주민의 비참한 과거가 펼쳐진다. 저자는 "광막한 시베리아가 있었기에 러시아의 풍요가 있을 수 있었다"고 단언한다.

시베리아는 러시아 경제의 젖줄이었다. 페루를 정복한 스페인 사람들이 황금에 이끌렸던 것처럼 17세기 러시아인은 시베리아의 모피에 매료됐다. 당시 러시아 총수입의 30%가 모피 무역에서 발생할 정도였다.

요즘 러시아 경제를 떠받치는 원유는 말할 것도 없다. 반면 원주민 입장에선 그건 엄청난 재앙이었다. 매독.천연두 등 러시아인이 퍼뜨린 각종 질병 앞에서 그들은 노적가리 쓰러지듯 사라져갔다.

수없이 되풀이된 학살극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일례로 사할린에 살았던 아이누족은 현재 씨가 마른 상태다. 자신들의 아기와 새끼 곰을 한데 뉘어놓고 젖을 먹일 만큼 평화를 사랑했는데 말이다.

이 책에는 인류학적 정보가 풍부하다. 갈피 갈피 '묻어있는' 핏자국 사이로 자연과 함께 살아갔던 옛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부각된다. 주술.무술로 통칭되는 샤머니즘(사실 저자의 가장 큰 관심사다)을 축으로 만물은 살아있다고 생각했던 그들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또 친척이 살림살이를 장만할 때는 십시일반으로 자기 재산을 내놓거나(부랴트족), 남편의 승인 아래 열네명의 남성과 사랑을 즐기는 여인(니브히족) 등 공존.공유의 전통도 들려준다.

저자는 시베리아의 희망도 읽어본다. 부존 자원이 풍부한 시베리아가가 인류에게 남은 마지막 미래의 땅이라는 것. 다만 자연과 삶을 하나로 여겼던 원주민을 이해하고 그들과 공존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베리아는 다시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땅이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과연 인류는 그의 순수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러기엔 지난 역사가 너무나 무겁고 어둡다. 경의선이 연결되고 남북 교류가 활성화되면 시베리아는 우리에게도 결코 '먼 나라'가 아닌데….

박정호 기자

<사진설명전문>
시베리아 샤먼들이 개인과 사회의 안녕을 비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주의의 민속 종교 억압 정책에 따라 이들 샤먼들은 역사의 기억 속으로 점차 밀려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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