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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한 달에 먹는 비스킷 1300개…엄마도 16남매, 아빠도 14남매 출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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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자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로사 피크(왼쪽)와 호세 포스티고 부부.

“언제든 놀러 오세요. 지금 당장 초대할게요. 저희 집은 항상 모두에게 열려 있거든요.”

18남매 낳아 ‘유럽의 대가족상’ 받은 스페인 여성 피크
23세에 결혼 후 거의 해마다 출산
한 달에 한 번씩 인터넷으로 장 봐
『다둥이 엄마…』10여 개국서 출간 화제

노트북 모니터에 나타난 여인은 유쾌했다. 엄지손가락 두 개를 쭉 펴면서 “당신을 만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리며 하트 모양을 만들었다. 기자가 준비한 인사말 ‘올라’(스페인어로 안녕하세요)를 꺼낼 틈도 없었다.

여인은 로사 피크(51)다. 18남매(현재 15남매)를 낳고 키웠다. 1989년 결혼 이후 거의 해마다 한 명씩 생명의 탄생과 함께했다. 그의 체험을 담은 『하나, 둘, 셋… 다둥이 엄마는 행복합니다』(루카출판사)가 최근 번역됐다. 이미 10여 개 나라에서 출간된 화제작이다. 최악의 저출산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는 우리 사회에 던지는 울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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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 피크(맨 왼쪽)·호세 포스티고(맨 오른쪽) 가족의 2010년 사진. 왼쪽부터 카르미네타·페리코·후암피·쿠키·마기·테레·로시타·가비·아니타·알바리토·페페·페파·파블리토·토미·롤리타·라파. 카르미네타는 2012년 22세에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후암피 포스티고]

로사의 일상은 여느 어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 셋을 심장병으로 잃는 고통도 있었다. 떵떵거릴 만큼 살림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작은 것 하나도 아끼고, 나누며 고사리들을 키워 왔다. 지난해 말 ‘유럽의 대가족상’을 받을 당시 주최 측 유럽대가족연맹(ELFAC)은 선정 사유로 ‘투쟁과 극복(struggle and overcoming)의 본보기’를 들었다. 인터뷰는 온라인 화상통화 서비스인 스카이프로 진행됐다. 한국에 유학 중인 그의 아들 후암피 포스티고가 통역을 맡았다.

아들과 인사부터 나누시죠.
“제 아들을 넘어 이제 한국의 아들이 된 것 아닌가요. 8월 24일 한국 독자를 만나러 갑니다. 이 책이 가족과 인생에 대해 보다 깊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한국의 출산율도 쑥쑥 올라가고요.”(웃음)
책을 보니 원래 대가족 출신입니다.
“저 또한 16남매 중 여덟째입니다. 다섯 살 많은 남편(호세 포스티고)도 14남매 중 일곱째고요. 8년 전 영국 BBC에서 방영한 ‘세계 최고의 대가족’에도 소개됐지요. 남편과 저는 대가족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23세에 결혼했으니 꽤 이른 편이죠. 결혼 첫해에 첫딸을 얻었어요. 4년 전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둘째, 셋째도 어린 나이에 잃었는데요.
“둘째(아들)는 18개월, 셋째(딸)는 열흘 만에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심장에 문제가 있었죠. 의사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부부의 침실은 신이든 국가든 누구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 예측도 틀릴 수 있고요. 새 생명을 결정하는 건 엄마와 아빠의 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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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엄마와 함께 요리를 하고 있는 막내 라파.

먹는 것부터 보통 일이 아니겠죠.
“요일마다 두 명씩 식사 당번이 있습니다.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짝을 이룹니다. 며칠 전 마드리드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일곱 살 막내 라파가 식탁을 차리고 있더라고요. 시킨 일도 아닌데, 엄마가 늦을 걸 생각해서 그랬다나요. 이런 게 행복 아닐까요.”
다들 양육비 문제로 고민하는데요.
“돈, 그게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수프를 끓인다고 보세요. 한 명 먹을 것에 물만 조금 부으면 둘이 먹을 수 있습니다. 절약하기 나름입니다. 저희 집에선 한 달에 한 번 인터넷으로 장을 봅니다. 비스킷 1300개, 우유 240L, 달걀 100개, 화장지 95롤, 감자 25㎏ 등등, 그것도 수퍼마켓 자체개발상품으로요. 물은 수돗물만 먹습니다. 생수는 과분하죠. 과일·채소 등 신선식품은 보름마다 집 옆 가게에서 삽니다. 팔다 남거나 상처가 난 건 싸게 살 수 있어요.”
한국말로 ‘또순이’라고 부릅니다.
“좋은 부모가 되려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석·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기를 쓰면서 왜 훌륭한 부모, 멋있는 가족이 되려는 노력은 게을리하나요. 가족만큼 훌륭한 대학은 없다고 봅니다.”

로사는 섬유디자인을 전공했다. 패션 업무를 20여 년 하다가 2004년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따고 현재 외부 기업체 마케팅·이벤트 일을 돕고 있다. 남편 호세는 육가공회사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2013년 책 출간 이후 세계 곳곳을 돌며 ‘행복한 가족 만들기’ 강연도 펼치고 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염수정 추기경은 추천사에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아이들을 기르는 것이 쉽지 않은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는지에 대한 비결이 들어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 교육비 부담이 엄청납니다.
“학교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스페인의 대가족 자녀는 대학 등록금이 거의 없어요. 딸 둘이 마드리드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데 각각 1년에 보험금 1.12유로(약 1450원)만 내면 돼요. 한국도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적극적인 정책이 필요할 겁니다.”
다시 돌아가, 왜 아이를 낳아야 하죠.
“현대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고독한 노년입니다. 돈이 많고, 집이 크고, 자동차가 좋으면 뭐합니까. 자녀가 없으면 외로울 뿐입니다. 주변을 보면 후회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죠. 돈이 있다고 외로움을 달랠 수 있나요. 친구나 사랑을 살 수 있나요. 가족은 행복의 원천입니다. 하루하루가 놀라움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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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 피크 부부가 낳은 18자녀를 상징하는 기호.

다시 태어나도 많이 나을 건가요.
“당연하죠. 아이들은 서로 자라면서 배려와 양보를 배웁니다. 저희 집만의 규칙이 있는데, 식사 중에는 물이든 빵이든 옆 사람을 챙겨 줘야 해요. 고기도 겉이 많이 탄 것을 먼저 고르고, 제일 맛있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 남겨 둡니다. 또 필요한 일 외에는 용돈이 없습니다. 열여덟이 되면 조금이라도 자기가 벌어서 써야 해요. 부모가 은행은 아니잖아요.”
그래도 남편이 최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세대는 아흔까지 산다고 해요. 자기 곁에 끝까지 남을 사람은 아내와 남편뿐입니다. 자식들은 크면 다 둥지를 떠나기 마련이죠. 부부간의 사랑은 불과 같습니다. 땔감을 계속 넣어 줘야 해요. 그래야 권태롭지 않습니다. 등산이든 외식이든 주말마다 꼭 둘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돈이 없으면 손을 잡고 집 주변 한 바퀴만 돌아도 돼요. 단, 스마트폰은 집에 놓고 가야 합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해 온 비결이 있나요.
“매일매일 아침 미사에 갑니다. 미사 후 30분 동안 묵상을 해요. 그날 할 일을 정리하고 계획도 세우죠. 그게 저의 가장 큰 힘입니다. 저만의 마약인 셈이죠. 하루 30분의 기적입니다. 종교는 달라도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바쁘면 바쁠수록 멈춰 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행복은 절대 TV 속 코카콜라·나이키 광고에 있지 않습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가족이 행복입니다. 아디오스(안녕)!”
연세대 다니는 둘째 후암피 “부모에게 받은 가장 큰 재산은 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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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유학 중인 연세대생 후암피가 인터넷으로 부모님과 만나고 있다.

“그럼요, 연부심이 얼마나 큰데요.” 연부심? ‘연세대 자부심’의 준말이란다. 기자도 처음 들었다. “한국 생활이 즐거운가”라는 질문에 대한 후암피 포스티고(한국명 서지환·22)의 대답이다. 축구 명가 ‘FC바르셀로나’의 고향 출신이라선지 축구 동아리 활동이 특히 재미있다고 했다. “연고전도 있잖아요. 하하하.” 이쯤 되면 절반은 한국인이다.

후암피는 연세대 경영학과 3학년생이다. 2012년 8월 가톨릭단체 오푸스 데이(Opus Dei·하느님의 사업) 회원으로 처음 한국에 온 그는 현재 경영학과 의류환경학을 복수전공하고 있다. 어머니 로사 피크의 육아 체험담을 한국에 소개한 주인공이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출산장려 공익광고를 보았어요 저출산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한국에 엄마의 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학교 친구들과 이 문제를 놓고 얘기도 많이 해보았고요.”

후암피는 18남매 중 다섯째다. 위로 남매 셋이 먼저 세상을 떠나 현재 15남매 중 둘째다.

“부모님에게 받은 가장 큰 재산은 관용(generosity)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배려죠. 대가족과 살다 보면 절로 마음이 넓어집니다. 멋진 자동차나 게임기를 받은 적은 없지만 형제자매만큼 귀중한 선물이 또 있을까요. 이번 책으로 생기는 수익금 전액을 사회에 기부할 작정입니다.”

그가 한국에서 힘들어했던 것은 매운 음식과 엄격한 선후배 관계. 이젠 모두 적응했다고 했다. “졸업 후 스페인과 한국을 잇는 의류회사에 취업할 겁니다. 계속 한국에 살고 싶어요.”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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