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24. 1백년 간 잃은 것과 얻은 것-박노자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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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한국의 근대화 풍경을 스케치 해 온 시리즈의 문을 이제 닫습니다.

연재를 시작할 때, 박노자 교수는 '열린 진보'의 입장에서, 허동현 교수는 '건강한 보수'의 입장에서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을 돌아보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리고 또 1백년 전과 오늘이 왜 그리 비슷한 점이 많은지 흥미롭다고도 얘기한 바 있습니다.

시리즈를 정리하며 1백년 간 얻은 것과 잃은 것은 과연 무엇인지 총괄적으로 짚어보려고 합니다.

1백년 전의 근대화론자들 가운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공화제 국가 모델을 최초로 제시한 단체는 '신간회'였습니다. 신간회는 양기탁.신채호.박은식 등 '대한매일신보'계통의 언론인과 윤치호.안창호 등 미국 지향적 기독교인이 1907년쯤에 조직한 비밀결사입니다. 그들은 인민과 나라의 전체적인 유신(維新)을 제기한 당대의 가장 급진적 근대화론자였습니다.

1910년 2월 22일부터 3월 3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20세기 신국민'이라는 글을 보면 그들의 지향점을 알 수 있습니다. 신채호가 쓴 것으로 추정하는 이 글의 주장은,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약자가 강자의 먹이가 되는 민족주의.경쟁의 시대에 한국 국민이 독립과 자유의 자격을 얻으려면 먼저 문명 열강의 전례대로 인민의 에너지를 풀어주는 계급 타파, 곧 세습 신분의 철폐와 만인 평등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만인 평등이란 업적에 따라 사회적 위치를 획득하는 가능성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리심을 버리고 공공심으로 무장해서 사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는 당위를 의미했습니다.

또 헌신이란 유럽 열강과 경쟁할 수준의 강력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 모두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뜻이자, 세계 시장 점령을 최종 목표로 삼고 외국 기술로 무장하여 생산을 늘리고,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상무(尙武)교육(군사 교육)을 실시하는 것을 의미했지요.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1백년 전 근대주의자들의 희망에 얼마나 부응한 것일까요? 그들이 선망한 기술적 근대성과 규율적 인간형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번창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의 바람대로 신분 계층의 경계선도 허물어졌습니다.

또 그들의 열망대로 오늘날 한국 기업들은 외국 기술을 잘 활용해 일부 품목에서 외국 시장을 석권하고 있으며, 한국의 군대는 적어도 양적인 면에서는 서구 강국이나 일본에 비해서 거의 2~3배나 큰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에 대결을 선언할 만큼 군사력을 키운 북한도 그들의 희망에서 아주 벗어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꿈꾼 근대화 프로젝트가 성공한 것일까요?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1980년대 후반 남한이 세계 체제의 준(準)핵심부에 진입함에 따라 문명국 모방을 핵심으로 삼은 1백년 전의 근대주의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결실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문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느끼듯이 미시적인 차원에서는 신민회 이념가들이 바라던 국민의 '유신'이 거의 이뤄지지 않은 데 있습니다.

신민회 핵심 회원들은 세력가에게 굽실거리지 않고 가족주의에 휩쓸리지 않는, 문중이나 고향보다 국가와 국민을 더 중요시하는 근대적 독립 개체로서의 국민이 출현하길 기대했습니다. 신민회 지도자들도 지방열(지역 감정)과 가족주의에서 결코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원칙상 전근대적인 연줄의 네트워크를 부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과연 연줄망이 중요성을 잃었습니까? 최근의 한 여론조사를 보면 20대 젊은이의 68%가 '연줄망'을 한국 사회에서 성공하는 열쇠로 믿고 있었습니다. 근대적 업적주의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또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볼 문제는, 근대화주의자들이 염원한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의 가시적인 성공을 위해 우리가 치른 대가가 과연 어느 정도였는가라는 것입니다. 환경 파괴와 노동자에 대한 무제한적 착취, 미국 군사력과 일본 자본에 대한 종속 등 굵직한 문제를 차치하고, 미시적인 영역만 들여다보더라도 우리의 근대적 생활은 끔찍할 때가 많습니다.

어릴 때부터 경쟁에서 이기라는 소리만 듣고 자란 아이들은 커서도 남과 연대하는 것의 중요성을 모르고, 휴식도 즐길 줄 모릅니다. 군사적 획일주의에 길들여진 국민들은 동성연애자.외국인 노동자.장애인 등 타자와 소수자에 대해서 공격적이며 경멸적인 태도를 취하고, 선진국(1백년 전엔 열강)을 선망하는 것만큼 후진국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그래서 근대 프로젝트를 심화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동시에 탈(脫)근대의 방향으로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설명>
서로 보지는 못하고 중앙일보 지면을 통해 '서신 논쟁'을 벌여온 박노자(左).허동현 교수는 마주 보자마자 못 다한 말을 털어놓기에 바빴다. 노르웨이에 있는 박교수가 여름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해 경기도 한 사찰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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