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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번역기가 필요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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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서경호 경제기획부장

서경호
경제기획부장

인공지능(AI)을 자랑하는 똑똑한 통·번역 서비스가 속속 나오는 세상이다. 외국어 피로증 없는 시대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 하나 글로벌 경제를 좌우하는 스트롱맨들의 말은 화려한 레토릭으로 포장돼 있어 경제적 함의를 읽어내기 쉽지 않다. ‘박근혜 번역기’처럼 ‘트럼프 번역기’나 ‘시진핑 번역기’가 필요한 세상이다. 최근 회자된 이들의 발언을 번역기로 돌려봤다.

트럼프·시진핑 등 스트롱맨 발언
레토릭 많아 실제 함의 따져봐야
미국은 스스로 ‘불량국가’ 선언
중국, 한국에 ‘사드 준법투쟁’

# “다른 나라가 우리 회사와 일자리를 훔쳐가며 미국을 유린하고 있다. 국경을 지켜 대번영 의 길로 가야 한다. 두 가지 단순한 규칙만 따르면 된다. 미국 제품을 사고 미국인을 고용하라.”( 트럼프 미 대통령의 취임사)

파이낸셜타임스(FT)의 표현대로 ‘원시적 중상주의’의 부활이다. 그것도 21세기 가장 강력한 시장경제 국가이자 제1의 기축통화국인 미국에서 말이다. 관세 폭탄을 휘두르는 보호무역으로 미국의 일부 산업과 노동자가 혜택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미국의 또 다른 산업과 해당 노동자, 소비자의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역시 레토릭이다. 실제론 경제 전쟁을 선포한 것이며 스스로 ‘불량국가(a rogue state)’임을 선언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외신의 해석에 더 눈길이 간다. 트럼프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를 전격적으로 선언하면서 미국 대외정책의 신뢰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국은 강한 나라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외골수처럼 제 갈 길만 계속 갈 수는 없을 것이다.

# “힘 모아 대처하면 이겨내지 못할 바가 없고 여럿이 지혜를 모아 행하면 못 이룰 것이 없다(積力之所擧 則無不勝也 衆智之所爲 則無不成也).”(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다보스 포럼 기조연설)

중국 고전 『회남자(淮南子)』에 나오는 말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다보스 포럼 기조연설에서 동서양의 고전을 풍부하게 인용했다.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도 나온다. 단순하고 직설적이며 논란을 부르는 트럼프의 언어와는 품격부터 다르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를테면 트럼프는 “중국이 우리에게 바가지를 씌우고 있다(ripping us off)”고 말하고 심지어는 “미국을 강간하고(raping) 있다”고 표현하는 등 길거리 어법을 마다하지 않는다.

“무역 전쟁에서는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며 자유무역의 수호자를 자임한 시진핑의 주장은 시의적절했다. ‘어두운 방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라는 비유를 들어 보호주의를 배격했다. 온실가스를 줄이는 파리 기후협약을 적극 지지했다. 시진핑이 미국 대통령 같은 발언을 하고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 같지 않은 말을 한다는 외신 평가가 나왔다. 트럼프와 다른 주장(Anything But Trump)은 국제사회에서 박수를 받았다. 다보스에서 시진핑을 가장 돋보이게 만든 주인공이 바로 트럼프였다. 트럼프가 자신과 갈등을 빚고 있는 중국 시진핑의 ‘마니또’ 역할을 한 셈이다. 마니또 게임은 제비뽑기로 정한 사람에게 일정 기간 동안 몰래 수호천사 같은 친구가 돼주는 놀이다.

# “어떤 권력도 다른 나라에게 특정한 길을 가라고 강권해서는 안된다. 발전은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것이다.”(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다보스 연설)

미국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말에서 따왔다. 인권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서방의 설교를 겨냥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개방과 세계화를 주창한 시진핑은 찬사를 받았지만 그에 걸맞는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비판이 터져나온다. 구글 등 인터넷 서비스의 접속을 허용하지 않는 게 대표적이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도입을 결정한 한국에 대한 중국의 ‘비공식적’ 보복도 시진핑의 다보스 발언을 무색하게 한다. 중국은 평소에 느슨하게 적용했던 국내 법규를 엄격하게 따지는 일종의 ‘준법 투쟁’으로 한국인과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을 힘들게 하고 있다. 비관세장벽으로 볼 수 있지만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없어서 세계무역기구(WTO)에 정식으로 제소하기조차 쉽지 않다. 한국이든 중국이든, 법을 지키는 준법이 규제가 되고 시위수단이 되는 세상은 정상이 아니다. 이런 잡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미국이 스스로 내려놓은 글로벌 리더의 자리를 중국은 절대로 차지하지 못할 것이다.

서경호 경제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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