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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하원 선거 1년 전부터 연정 파트너 찾기 대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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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호 14면


취재팀이 독일 베를린의 분데스타크(연방 하원) 의사당을 찾은 지난해 10월 18일. 2017년 연방 하원선거(9월 24일 예정)를 1년가량 앞두고 사민당-좌파당-녹색당이 한창 연합정권 논의를 위한 3당 의원 회의를 하고 있었다. 연방 하원의원 100여 명이 참석한 회의는 이른바 적-적-녹 연정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한 탐색전의 성격이 짙다. 지그마어 가브리엘 사민당 대표는 이날이 회의뿐 아니라 3당 연대를 준비해 온 정치인 5명과의 소모임에도 참석했다.

연정 구성을 위한 3당 회담의 초점은 의료보험과 세제 개편, 기후 보호 등 철저하게 정책 조율에 맞춰져 있다. 연정 하면 대개 내각이나 의회직의 자리 나눠 갖기를 떠올리는 한국의 풍토와는 생경한 장면이다. 하이케 베렌스 사민당 연방 하원의원은 “구체적인 연정 협상을 하기 위한 게 아니라 서로 알고 지내며 대화하기 위한 것”이라며 “독일에서는 현재의 연정과 상관없이 그런 대화를 하는 것이 일상적”이라고 설명했다. 일종의 준비대화인 셈이다. 이날 모임에 참석한 베르벨 횐 녹색당 연방 하원의원은 “이런 모임은 3당이 서로 정책 조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데서 긍정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횐 의원은 “정당 간에 의사소통을 위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선과 상관없이 진행이 가능하다”고 했다.


현재 앙겔라 메르켈 정부는 기민·기사연합(중도우파)과 사민당(중도우파) 간의 대연정을 구성하고 있다. 원내 제1당과 2당 간의 연합으로, 한국으로 따지면 분당 전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간의 연립정부인 셈이다. 전체 하원 의석 630석 중 기민·기사연합이 310석, 사민당은 193석을 차지하고 있다. 메르켈의 기민·기사연합은 의석의 절반밖에 갖고 있지 않지만 연정 구성으로 메르켈 정부는 의회 80%의 지지를 받게 돼 안정적이고 힘있게 정책을 추진해 나갈 수 있게 됐다. 대연정이 갖는 매력이자 장점이다. 현재 야당은 녹색당(63석)과 좌파당(64석) 이다.

[의회서 절대 다수 만들려면 정치적 바터 필요]
의원내각제를 하고 있는 국가들은 군소정당의 난립으로 연정 구성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있다. 최근 스페인에서 두 번의 총선 끝에 10개월 만에야 간신히 국민당 소수정부가 출범한 것이 가장 좋은 예다. 허약한 정부가 출범할 수 있다는 게 내각제의 약점이다. 하지만 전후 독일이 모범적인 내각제를 운용해 오고 있는 것은 ‘대화와 타협을 통한 대승적 양보’를 만들어 내도록 설계된 선거제도와 정치문화에 있다. 이런 정치문화는 ‘나치 독일’의 전철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독일인들의 집념과 의지의 산물이기도 하다.


미하엘 크레치머 사민당 연방 하원의원은 “독일은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큰 정당들이 서로 싸우는 좋지 않은 경험이 많았다. 이런 것들이 나치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다. 대화나 설득, 타협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지금의 정치적 배경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9월 총선 이후에도 하나의 정당이 50% 이상 의석을 얻는 게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에 미리 연정 구성에 대비한 정당 간 대화와 협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된다. 정책 조율과 협상의 일상화라고 할 수 있다. 구춘권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협치와 분권을 의미하는 연정은 독일의 오랜 정치문화 전통”이라며 “집권당이 의회에서 50% 이상의 절대 다수를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당과 정치적 바터(거래)를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들어선 독일 정부 가운데 순수하게 1개 정당이 과반 의석으로 집권한 예는 없다. 사실상 같은 정당이나 다름없는 기민당과 바이에른주 자매정당 기사당이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시절인 1961~62년 집권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정부가 복수 정당 연립으로 구성됐다. 김학성(정치학 박사) 충남대 평화안보대학원 교수는 “이는 바로 독일 정치 환경이 협치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게 돼 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연정은 독일 정치의 필연이자 숙명이다. 따라서 정치인들에게 요구되는 제1의 덕목은 타협 정신이다. 미하엘 그로세-브뢰머 기민당 원내수석총무는 “정책이 서로 다른 정당끼리의 연정은 우리에게도 큰 도전”이라며 “정치인들이 꼭 가져야 할 것은 타협하는 능력이라고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가 말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전후 독일에선 대연정 세 차례 수립]
독일에서 전후 기민·기사연합과 사민당 간의 대연정이 들어선 것은 벌써 세 번째다. 대연정은 국가적 위기 극복을 위한 ‘응급 연정’으로 불리기도 한다. 국내외의 도전에 맞서 확고한 안정 과반 의석이 필요할 때 들어서기 때문이다. 2013년 현재의 3차 대연정이 탄생할 때가 대표적인 예다. 크레치머 사민당 의원은 “국제 금융위기와 유럽 재정위기의 여파가 휩쓸 당시 이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정부가 필요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대연정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대정신(Zeitgeist)이 어떤 연정을 구성하느냐는 중요한 가이드라인이 된다는 말이다.


배렌스 사민당 의원은 “당시에도 적-적-녹 연정 가능성이 있었지만 사민당과 좌파당의 외교정책 차이가 컸고 국제적 위기에 잘 대처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정부가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 대연정으로 가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르트무트 코시크 기사당 연방 하원의원은 “대연정은 소연정보다 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리하다”며 “2005~2009년 제2차 대연정 때도 경제·재정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대연정은 뚜렷한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카타리나 란트그라프 기민당 의원은 “두 거대 정당 간의 대연정은 더 폭넓게 정부를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며 “하지만 협상과 정부 구성 과정에서 많은 타협으로 정당의 고유한 정책 방향이 상실돼 색깔이 모호해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유권자들도 있다”고 말했다. 배렌스 의원도 “압도적인 과반 대연정은 소수 야당을 위축시킬 수 있다. 또 정권 교체를 원하는 사람들은 대연정을 반대하기도 한다”고 전했다.


선거가 끝난 뒤 협상은 먼저 의중탐색대화부터 한다.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말 그대로 의중을 물어보는 것이다. 여기서 뜻이 맞을 경우 정식 연정 협상에 들어간다. 2013년 총선 후 기민·기사연합은 우선 녹색당과 의중탐색대화를 시작했지만 무산됐다. 횐 녹색당 의원은 “당시 흑(기민·기사연합)-녹(녹색당) 연정을 완성하기에는 정책의 차이도 컸고 너무 준비가 안 돼 있었다”고 평가했다.

[연정 들어가기 전에 치열한 협약 협상]
연정 협상 과정은 치열하다. 각각의 당이 내건 노선과 정책, 정체성을 최대한 살려 ‘연정 협약’에 반영하려 하기 때문이다. 연정을 나눠 먹기식의 전리품처럼 여기는 풍토와 정치문화에선 성공하기 어렵다. 란트그라프 의원은 “협상단은 마치 각 부처 장관실처럼 조직적으로 시스템화돼 있다”며 “정치 경험이 많은 정치인, 주 의회 관계자, 지난 정부에 참여한 전직 차관급 등이 모여 치밀한 준비를 한다”고 소개했다.


크레치머 의원은 “사회·경제정책이 서로 차이가 큰 정당 사이의 연정 협상은 쉽지 않았다”며 “연정 협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책이 매우 상이한 것은 포기하고 조율이 가능한 것은 타협과 양보하는 자세로 협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로 다른 점은 인정하면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구동존이(求同存異) 정신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란트그라프 의원은 “협상 과정은 기브 앤드 테이크(주고받기)다. 협상을 하면서 관철시킨 부분보다 양보한 부분이 많다면 협상 후반부에는 더 강하게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어린아이들 싸움 같지만 이것이 바로 정치가 아닌가. 협상 과정에서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해 참여자들은 최대한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정치인에게 있어선 연정으로 집권하는 것 못지않게 당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정권에 참여할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책 타협 과정에서 지지자를 잃을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면 스스로 야당으로 남는 경우도 많다. 배렌스 의원은 “사민당은 우리 정책을 실현할 수 있을 때만 집권당이 된다는 원칙을 고수한다”며 “물론 너무 많이 타협했다는 비판도 나올 수 있지만 사민당 정책 중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을 최대한 실천하도록 시도했다”고 말했다.


녹색당은 2013년 총선 후 기민·기사연합이 주도하는 연정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거절했다. 횐 녹색당 의원은 “연정에 들어간 뒤 어떠한 문제도 성공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문제 해결을 못하면 차라리 야당으로 남는 게 좋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베를린·드레스덴·마인츠·바이로이트=특별취재팀


특별취재팀=한경환·김경빈·차세현 기자, 한우창 경성대 교수(마인츠대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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